<챔피언>은 김득구의 영화지만, 챔피언의 꿈을 품고 함께 달린 동세대 복서들의 영화이기도 하다. 그중에는 귀에 익은 이름, ‘동양 챔피언 박종팔’도 있다. 그런데… 그 박종팔이 이 박종팔이란 말인가. <챔피언>에서 그는 실없는 농담과 엉뚱한 행동으로, 공기가 팽팽해지거나 무거워질라치면, 여지없이 풀어주고 띄워준다. 흔히 ‘감초’라 부르는 코믹한 캐릭터. 기억 속의 늠름한 챔프 박종팔이 실제로 저런 코믹한 인물이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또 다른 궁금증이 일기 시작한다. 박종팔을 연기한 저 배우는 대체 어디서 나타난 누구일까.
그의 이름은 김병서다. ‘<챔피언>의 박종팔’을 인터뷰하러 간다고 했더니, 누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아, 그 대학 가던 개그맨(김종석)!”하고 아는 체를 했다. 그 기억이 나서 ‘누구 닮았다는 얘기 많이 듣지 않냐’고 첫 인사를 건넸더니, 김병서는 대뜸 “문천식이요?(‘와룡봉추’의 흰 양복)” 하고 되묻는다. 그러고보니 둘을 다 닮았다. 배우 당사자야 남 닮았다는 얘기가 싫겠지만, 관객으로서는 그런 이유로 처음 보는 배우를 친근하게 느끼기도 한다. 게다가 그는 <챔피언>에서 웃음을 주는 배우이니 만큼, ‘초장부터’ 관객과 쉽게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안면도 총각 김병서는 본래 <챔피언>의 제작부였다. 우연히 연극계에 발을 들였다가 영화로 눈을 돌렸지만,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라서” <간첩 리철진> <킬러들의 수다> <극단적 하루> 등의 제작부를 거친 뒤였다(그의 막내 매형의 동생이 바로 장진 감독이다). 그런 김병서를 눈여겨본 곽경택 감독이 “박종팔 캐릭터에 잘 맞겠다”며 오디션을 권했다. “어렸을 때 <울지 않는 호랑이>라고 이계인씨가 김득구 선수로 나온 영화 있었거든요. 그거 보고 되게 감동했는데, 저한테 그런 영화에 출연할 기회가 온 거예요.” 배우가 되기 위해 둘러가는 길로 제작부를 택했던 그로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박종팔 선수를 찾아가 1개월 반을 함께 생활했고, 틈틈이 액션스쿨에 나가 몸을 만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사람들을 웃겨야 한다”는 데 대한 부담감. 34번 NG를 내고 얼굴에 경련이 일던 날, ‘표정으로 웃기는’ 연기의 난이도가 얼마나 높은지를 실감했다. “남들 고생 많이 시켰지만, 저 자신은 많이 배웠고, 업그레이드됐어요. 솔직히 촬영 끝나고 영화 개봉한 지금도 개운하진 않아요. 잘 못했잖아요.”
첫 영화의 여운이 오래가는 법이라, 김병서는 아직 차기작을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처음부터 코미디 배우로 자리를 굳히기보다는 다양한 장르, 다양한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본래 몸이 좋은 편인데다 운동을 좋아해서, 본격적인 액션연기를 하고 싶기도 하지만, 정작 하고 싶은 영화는 따로 있다. “멜로요. 멜로 진짜 해보고 싶어요.” 김병서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목소리톤이 올라가며 흥분한다. “사람들이 그러겠죠. 아니다. 코미디 해라. 그런데 저 배우한다고 할 때도 그랬어요. 아니다. 넌 배우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 있잖아요.” 왠지 모를 이끌림 절반, 오기 절반으로 김병서는 어제처럼 오늘도 돌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