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퀴즈
하나. 하루 중 아직 밝은 어느 때, 신도시의 어느 한적한 아스팔트 골목길 위에 한 여자가 쓰러져 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폴더가 떨어져나간 휴대폰과 작은 세탁전표 하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번, 과음하고 길에서 잠이 들었다. 2번, 뺑소니 사고. 3번, 투신자살. 4번, 노상강도의 습격. 문제는 쉽지 않다. 여자는 노숙을 한 사람 치고는 상당히 깨끗하며 근처에는 핏자국도 없고, 돈을 털린 흔적도 확인되지 않는다. 차바퀴자국도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면 답은 몇번일까. 고민을 하다 포기하고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허무하겠지만 그가 일단은 정답자다. 잠시 뒤 여자는 깨어나지만, 그녀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고, 자신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면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남편은 아내 없는 빈집에서 그저 그녀가 ‘사라졌다’라고만 말하고 있다.
문제의 수수께끼는 바로 한국, 타이, 홍콩, 세 나라의 감독들이 ‘아시아의 공포’를 주제로 만든 단편영화 셋을 옴니버스로 연결한 영화 <쓰리> 중 김지운 감독의 작품 <메모리즈>의 한 장면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여자가 바로 김혜수. 김혜수는 <메모리즈>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채 자신의 정체를 찾아 헤매는 신도시의 30대 주부 역을 맡아 처음으로 호러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말 그대로 ‘연기변신’.
<메모리즈>에서 김혜수는 기존의 이미지와는 아주 다른 어둡고 창백한 얼굴을 보이며 섬뜩한 시체 연기까지 한다. <메모리즈>의 김혜수는 더이상 우리가 알고 있던 그 김혜수가 아니다. 힘찬 목소리에 애교를 섞어 또렷한 발음으로 대사를 날리고, 긴 머리 찰랑이며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곤 하던. 발랄한 코믹함, 건강미, 건전한 섹시함…. 오랫동안 걸려온 그녀의 ‘간판이미지’들은 네온사인이 꺼진 간판처럼 희미하게 뒤로 물러서고, 대신 불안과 혼란이 서린 서늘한 무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생소한 포즈로 드리워져 있다. 그래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존의 밝은 이미지는 영화를 떠도는 스산함과 이상한 부조화를 이루며 괴괴한 공포감을 부른다. 김혜수의 캐스팅 자체가 이미 하나의 반전을 품은 듯, 그녀의 존재가 호러 분위기와 묘한 불협화음을 빚어내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한 가지 모습일 수 있나요.” 김혜수는 수수한 말로 호러영화를 처음 해본 소감을 밝힌다. “사실 그동안 전 작품보다는 그 외적인 이미지가 더 많이 부각돼 있었어요. 매체를 통해서 제 실제보다 더 스트롱한 이미지를 갖게 됐죠. 사람들은, 보이는 여러 이미지 중에서 제일 강렬한 것 하나를 갖고 사람을 기억하는 것 같은데, 밝고 건강하고 그런게 제게는 가장 강한 이미지였던 것 같아요. 전 밝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게 틀린 것도 아니지만, 그게 제 다는 아니었어요. 음, 김지운 감독님 영화 속 인물들은, 사실 조금씩 다 전형적인 것에서 비껴나 있잖아요. 그런 거예요. 김지운 감독님은 열린 마음으로 제 그런 모습을 봐낸 거죠.”
‘전형적’인 ‘김혜수스러움’에서 살짝 많이 비껴나 있는 ‘<메모리즈>의 김혜수’는, 아마도 김혜수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고개가 될 것 같다. 열여섯살 때인 1986년 <깜보>로 데뷔한 이래 <첫사랑> <닥터 봉> <찜> <신라의 달밤>, 최근 <YMCA야구단>까지 16년 동안 17편이라는 적지 않은 영화에 출연했지만, 김혜수는 아직 ‘연기자’로서보다 ‘여배우’로서 더 강한 아우라를 갖고 있다. 작품 안에서보다 밖에서 더 화려한 이미지로 다가오기도 하는 그녀의 이미지는, 여자연기자로서 기분 좋기도 안 좋기도 한 일일 것이다. 영화연기자로서 김혜수는 팬시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겨왔다. <첫사랑>은 그것이 가장 잘 빚어진 작품이고, <신라의 달밤>의 라면집 주인 역도 김혜수의 팬시적인 연기가 살아 있는 캐릭터다. <메모리즈>에서 김혜수는 그런 팬시풍의 느낌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선지 그늘지고 어두운 내용의 이야기지만, 김혜수는 그 속에서 더 투명하고 더 성숙하고 더 가벼워 보인다.
“예전에는 좋은 작품, 좋은 캐릭터, 좋은 감독, 이런 것보다는 그냥 사람들하고의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배우고 지내는 것에 의미를 뒀어요. 그런데 이제는 좀 태도가 달라졌어요. 제 인생 전체를 봤을 때 분명히 가장 활발하고 아름다운 시기가 있을 거예요. 과거 몇년이 그랬을 테고, 또 앞으로 몇년이 그렇겠죠. 그런데 그 시기들을 지나고 나서, 그냥 ‘아 그런 때가 있었지’ 하고만 싶지는 않아졌어요. 그 활발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연기자로서 좀더 의미부여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뭐가 달라졌냐구요? 이젠 신중하고 모든 게 조심스러워요. 작품 고르는 것부터. 그리고 정말 욕심도 생기네요.”
서른두살, 여전히 ‘활발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활발하고 아름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배우 김혜수. 그녀에게 일어나고 있는 작은 변화를, 8월 <쓰리>에 이어 10월 <YMCA야구단>에서도 감지해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