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킹카녀와 푼수녀 사이,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의 김서형
2002-08-21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이혜정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는 여성 캐릭터의 종합선물세트 같다. 착하면서 실수투성이인 여자, 둔하면서 감상적인 여자, 터프하면서 마음약한 여자, 푼수에 과격한 여자…. 대부분 ‘착한 나라’에 발을 걸치고 있는데 비해 ‘나쁜 나라’의 기운을 풍기는 이 여자, 단연 튄다. 또랑또랑한 하이톤의 목소리. 극중 정준호의 옛 애인으로 등장한 커리어우먼, 일명 ‘네! 실장님’을 연기한 김서형은 첫눈에 보기에도 ‘딱이다’ 싶을 만큼 서늘한 눈매에 길고 가는 팔다리를 가진 서구적인 미인이다.

“세련되고, 섹시하고, 화려했으면 좋겠어요.” 캐스팅 때의 주문이었다. 등장부터 신은경을 긴장시켜야 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주인공과 대조되는 설정을 요구하는 인물이었다. 대사 중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 ‘이강연’ 대신에 처음 시나리오에는 그저 ‘킹카녀’로 표기되어 있었던 역할. 즉 ‘도도하고 잘 나가는 현대 여성’의 이미지만 담아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김서형이 연기하는 이강연은 조금 다르다. 외모상으로는 100% 시나리오 그대로지만 이면에 왠지 모를 어긋남과 빈틈을 가진, 그래서 정이 가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단순한 ‘설정’에서 생명을 가진 캐릭터로 만들어간 것이다. “솔직히 신이 많은 건 아니거든요. 총 6신 정도? 그런데 보는 분들마다 내 신이 그보다는 많은 줄 알았다고 하세요.” 그만큼 인상적이었다는 얘기다. “사실 많이 신경을 쓰지 않은 역할인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좀더 욕심을 부렸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도 들어요.”

미스 강원 출신의 김서형은 KBS공채 탤런트로 연기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드라마 <딸부잣집>부터 시작해 몇년 동안 조역, 단역까지 텔레비전 활동을 했지만 “마음 상하는 일을 몇번 겪고” 잠시 연기생활을 접었다. 가끔 커리어우먼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CF로 소일하던 그는, 어느 순간 “이건 어릴 때의 막연한 동경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다.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다시 시작하자”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기회는 오히려 영화쪽에서 찾아왔다. <찍히면 죽는다>의 양호선생님, <베사메무쵸>에서는 발레선생님,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 ‘무지개’가 아닐까 의심되던 무용과 경희로 조금씩 비중을 높여가던 무렵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저 알고보면 푼수예요.” 생긴 것 같지 않게 털털하고 소박한 편이라면서도 김서형은 “적어도 내 공간에 있는 것,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물론 어릴 적부터 시작한 배우들보다 늦은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구하다고 봐요.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아요. 저는 여전히 백지인 걸요. 그려나갈 일만 남았죠.” 적어도 그에겐 채워진 공간보다는 채워나갈 공간이 많은 듯 보인다. 게다가 그 백지의 크기 역시, 아직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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