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세상아 덤벼라,나는 더 자라야겠다, <연애소설> 배우 김남진
2002-10-02
글 : 황선우
사진 : 정진환

낯선 여인이 휴대폰 화면 안에다 한 사내를 가둔다(스카이 CF). 구두닦이 소녀는 깨금발로 뮤직박스 너머의 DJ를 훔쳐보며(왁스의 <부탁해요> 뮤직비디오), 소설을 빌리러 온 아이는 책 대신 카운터에 앉은 오빠의 마음을 품고 돌아가고 싶다(<연애소설>). 그녀들의 공통점은? 갈망하는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그 끝에 이 남자, 김남진(27)이 있다는 것. “요즘 군대에서는 저렇게 비실비실하고 약한 사람도 데려가나봐.” 짝사랑 오빠의 입대가 안타깝기만 한 문근영의 한숨에 객석에서는 웃음이 큭큭 터져나왔을 만큼 한눈에도 무척 건장해 보이는 김남진은, CF와 뮤직비디오로 먼저 얼굴을 알렸으며 패션쇼 캣워크를 7년째 밟아온 모델이기도 하다.

처음 <연애소설>의 오디션을 보러간 그에게 이한 감독은 시집을 한권 던져주고 낭독해보라 주문했다. 대사가 많지 않은 배역인 만큼, 연기력보다 목소리의 느낌과 이미지로 캐스팅이 된 셈이다. 책방신 하루, 머리를 빡빡 깎은 군대장면 하루, 도합 이틀 만에 촬영을 몽땅 마쳤을 정도로 짧은 등장이었지만, 첫 영화는 제대 뒤 서서히 엔진을 예열 중이던 그에게 불을 확 질렀다. “제가 피아노 전공인데, 피아노 앞에 앉는 게 힘들 정도로 무대공포증이 심했어요. 그런데 영화 찍으면서,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어요. 문근영씨 초롱초롱한 눈에 마술 걸린 것처럼, 말과 말이 오가는 순간의 마법 같은 느낌.” 그리고 무엇에 홀린 듯 촬영을 마친 뒤, 그는 연기로 밥 먹고살아도 되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96년 패션모델로 데뷔, 76년생, 낮은 목소리와 서늘한 눈.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먼저 ‘뜬’ 동갑내기 배우 유지태와 비교당하는 건 그에게 불쾌한 일일까? 혹은 초조함을 불러일으킬까. “남들보다 뭐든지 늦게 되는 편이에요. 그렇지만 늦더라도 꼭 되죠. 생각하고 있는 것의 끈만 놓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꼭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막연한 표현 속에 날선 각오를 내비치는 그는, 승부를 재촉하기엔 아직 젊은 자신의 가능성과 그 이면의 한계를 한번에 보듬는다. “나는 스물일곱의 삶밖에 몰라요. 그것도 내 환경에서 내가 경험한 만큼밖에는 보지 못하죠. 연기를 잘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그 준비과정이 더 어렵다고 봐요. 살아보고, 인생을 알아가는 것.”

<연애소설>에서 ‘책 빌려주는 남자’던 김남진은 곧 <밑줄긋는 남자>로 변신해, 배두나와 호흡을 맞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을 언급하고, 르 클레지오의 <조서>에서 위안을 얻었다는 그는 책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빛내고 볼을 붉히는 독서광이다. 그리고 책읽기만큼이나 순간에 어울리는 음악을, 스타일 갖춰 옷입기를, 클럽에서 춤추기를 좋아하는 청년이기도 하다. 지금, 영화 다음으로 머리 속을 채우고 있는 생각은 ‘놀고 싶다’는 거라고 스스럼없이 고백도 한다.

“사는 게 연기 공부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것. 수천수만 가지 성격이 존재한다는 것, 너무 재밌잖아요.” 그러고보니 김남진은 인터뷰 내내 ‘재밌다’는 말을 쉰번쯤 쓴 것 같다. 마치 세상에 흘러다니는 달고 쓰고 짜고 신맛들을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빨아들이겠다는 스펀지 같은 기세로. 어떤 배우로 성장해나가든, 김남진에게서 눈을 떼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우울한 유약함과 남성적인 강함이 공존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보면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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