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텝 25시]
<중독> 음악감독 정재형
2002-11-13
글 : 심지현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시나리오에서 멀리 떠나면‥

96년 말, 베이시스 2집 <The Unbalance>를 마치고 정재형은 돌연 영화 한편과 조우한다.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 대상 수상작이었고, 당대의 톱스타 대여섯명이 출연하는데다, 충무로에 그닥 나쁘지 않은 평판을 남겨놓고 TV로 갔다가 야심만만하게 귀향한 감독 선우완이 메가폰을 든 작품이었다. 서해안 안면도 끝자락에 오롯이 정체를 드러내고 선 <마리아와 여인숙>에서 정재형은 대중음악과 클래식 사이의 실험을 마치고, 영상이라는 새롭고도 낯선 대지에 입을 맞춘다. 영화음악과의 첫 키스는 세련되지도, 달콤하지도 않고 그저 얼떨떨했다. “창피하더라고요. 그 땐 영화음악이 뭔지도 모르고 만들었으니까.” O.S.T가 따로 발매되지 않고, 그룹 3집 <Friends>에 덧실린 영화의 주제곡 <마리아의 테마>는, ‘창대한 결과’를 위한 ‘미약한 시작’으로 훌륭히 기능해낸다.

외환 위기가 막바지에 이른 97년 말, 그는 영화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홀연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표준화되고, 습관화되었다는 점에서 클래식과 대단히 일맥상통하는 영화음악에 그는 빠른 속도로 익숙해졌다. 영화음악과를 수석 졸업하기 전,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프랑스영화의 음악을 담당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지는 않았지만, 미스터리 심리스릴러로 비교적 호평을 받은 이 영화의 음악 작업은 훗날 <중독>에서의 음악 작업을 한결 수월하게 했다. 온순하고 평온한 멜로가 아닌, 광기어리고 불온한 사랑 이야기 <중독>은 그런 점에서 그와 처음부터 궁합이 잘 맞는 영화였다. “제 음악 색깔도 그렇거든요. 아주 밝거나 경쾌하지는 않잖아요. 어딘지 모르게 스산하고, 음울한 빛깔을 띠는 게 심리스릴러에 잘 어울릴 법한 음악들이죠.” 올해 3월쯤 시나리오를 받았지만, 결정은 5월이 다 돼서야 내릴 수 있었다. 유학까지 와서 영화음악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남들보다 100배쯤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지 않았다. 더군다나 솔로 2집 발매와 콘서트 시기가 맞물려 물리적 상황도 썩 좋지 않았다.

러시필름을 받기 전, 전체적인 음악 구상을 위해 그가 택한 것은 시나리오와 멀어지는 것이었다. 일단 머리 속에 든 내용만 가지고, 그는 여름 내내 유럽여행을 했다. 샘플이라도 들려줄 수 없냐는 제작사의 요청에 단호하게 고개를 젓던 그는, 8월 초 러시필름을 확인하면서 컨셉 조정과 세부 음악 작업을 짧은 시간 안에 해치우고, 9월28일 최고의 스탭들과 오케스트레이션 작업에 돌입한다. 꼬박 2주간의 작업을 마치고, 완성곡을 들려주자 제작자의 얼굴에선 희비가 교차했다. 음악적 퀄리티에는 대단히 만족스러워 했지만, 그를 위해 두배 이상 초과된 제작비에는 당황한 눈치였다. “제가 숫자에 둔감하거든요. 좋은 음악만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제작비를 초과했더라고요. 제작사엔 미안하지만, 음악이 좋으니까 만족스럽죠.” 영화 속 음악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는, 일부러, CD에 첨부되는, 음악 설명과 배우 사진으로 빼곡한 8쪽짜리 부클릿을 취소하고 단 두쪽짜리(그나마 한쪽은 사진인) ‘불친절한’부클릿을 준비했다. 11월 초 , 에콜 노마르에서 클래식 작곡 석사과정을 마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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