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당장 뉴질랜드로 가줄 수 있어?” 1999년의 여름, 에이전트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비고 모르텐슨은 그저 ‘괜찮은 배우’였다. 1985년 <위트니스>에서 아미쉬 농부 역으로 데뷔한 이래, <퍼펙트 머더>에서 기네스 팰트로의 정부 역할이나 <G.I. 제인>에서 드미 무어를 괴롭히는 엄한 교관 역 등을 맡아왔지만 조연인 그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뉴질랜드에서 촬영을 준비하던 <반지의 제왕> 제작진으로부터 급작스런 출연제의를 받았던 것은 행운일지 모른다. 애초 이 영화에서 아라곤 역은 스튜어트 타운젠드라는 아일랜드 배우의 몫이었지만, 프리 프로덕션 도중 피터 잭슨 감독은 아라곤이 이 26살짜리 배우가 맡기에는 너무 큰 역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르텐슨은 비록 교체 멤버였지만 제작진들로 하여금 ‘드디어 임자가 나타났다’는 환호를 지르게 했다. ‘수수께끼 같은, 수심에 잠긴, 잘생긴’. 당초 아라곤 역을 캐스팅할 때 지침으로 삼았던 이 세 가지 형용사가 모르텐슨 안에 절묘하게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텐슨과 아라곤은 이미지에서만 유사한 게 아니었다. 뉴질랜드에 도착한지 이틀 만에 가진 첫 촬영에서 그는 완전한 아라곤의 모습이 돼 있었다. 피터 잭슨은 “촬영이 시작되자 비고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아라곤과 동일화됐다”고 설명한다. 모르텐슨의 아라곤으로의 ‘변신’이 어느 정도였냐 하면, 어느 날 잭슨은 모르텐슨을 식당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뒤 그의 머릿속으로 뭔가 스쳐갔다. “30분 동안이나 이야기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그를 ‘아라곤’이라고 불렀고, 그 역시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심지어 ‘촬영 기간 내내 모르텐슨이 아라곤의 갑옷을 입고 칼을 옆구리에 낀 채 매일 숲에서 잠을 잤다’는 기사가 일부 신문에 보도됐을 정도. 아라곤이 된 모르텐슨은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스턴트맨이 자신 대신 아라곤이 돼 숲을 누비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 탓인지, 몇 장면을 제외한 대부분의 액션장면에서 그는 직접 칼을 휘둘렀다. 말 타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특별히 요청해 시나리오도 일부 바뀌었다. 격한 전투신을 찍다가 상대 배우의 실수로 앞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을 때 그가 부러진 이를 들고, “강력접착제로 붙인 뒤 촬영을 계속하면 안 될까”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촬영장의 전설이 됐다. 모르텐슨의 열정은 어둠의 세계로부터 중간대륙을 지켜내겠다는 아라곤의 불굴의 투혼과 견줘도 부끄러울 게 없어 보인다.
이처럼 헌신적인 그의 연기는 44년 동안의 만만치 않은 삶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덴마크 출신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모르텐슨은 부친의 사업 때문에 유년 시절을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 라틴아메리카 일대에서 지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할아버지의 농장이 있는 덴마크에서 사촌들과 함께 살며 웨이터, 돼지운반 트럭운전사, 꽃 판매 등의 일을 했다. 뉴욕으로 돌아와 연기생활을 시작한 85년부터 10년 동안 그의 연기자 인생도 그리 화려하진 않았다. 출연 제의가 많지 않았고, 맡은 역의 비중도 작아 웨이터, 바텐더, 트럭운전사로 돌아가야 했다. 이 와중에 그에겐 악역이 많이 주어졌지만, “아직까지 내가 싫어하는 캐릭터를 연기한 적은 없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팍팍한 삶으로 여러 계층의 타인들을 잘 이해하고 있던 그는 매 작품에서 성실함을 보여줬다. <퍼펙트 머더>에 출연할 때 영화 속 주인공처럼 브루클린의 아파트를 빌려 살았다는 이야기에서처럼, 그를 아라곤으로 만든 진정한 힘은 영화 속 캐릭터가 되기 위해 자신을 과감히 버리는 노력이었다.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은 그를 명실상부한 액션영웅의 자리에 올려놓을지도 모른다. 반지의 저주로 괴로워하는 프로도 대신, 그는 악의 무리에 맞서 온몸을 던져 중간대륙을 수호한다. 개미떼처럼 헬름 협곡으로 밀려오는 오크족에 맞서 영웅스런 전투를 펼치는 그의 모습은 천하를 호령하던 여포나 조자룡을 떠오르게 한다. 강인한 얼굴과 단단한 체격, 뛰어난 승마능력을 갖춘 그는 내년 <반지의 제왕> 3편과 서부극 <알라모>, 사막의 말 경주에 출전한 한 우편배달부의 이야기 <히달고>에서 여전히 용맹스런 기상을 뽐내게 된다. 하지만 그가 다른 액션스타처럼 근육에 비해 뇌가 너무 작은 ‘전투기계’로 전락할 것이라고 짐작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그는 지적이면서 매력적인, 새로운 개념의 액션영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뉴욕에서 전시회를 연 경력을 가진 사진작가이며, 시집을 낸 적 있는 시인인데다, <퍼펙트 머더>에서 실제로 벽화를 그렸을 정도의 화가이고, 여러 장의 음반을 낸 음악가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아들 헨리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는 게 싫어 <반지의 제왕> 출연을 거부하려 했던, 그리고 어딘가 머물기보다는 “희망차게 여행하는 과정을 가장 좋아한다”는 ‘진짜 비고 모르텐슨’의 모습이 그런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