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란도 블룸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다. 갈색눈과 머리카락, 어두운 피부를 가진 블룸이 거리를 걸어갈 때면 창백한 금발의 엘프 레골라스는 이 앳된 청년을 바람처럼 통과해 중간계의 아득한 시간 너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손목 위엔 지워지지 않는, “엘프의 생명처럼 영원한” 문신 하나가 엘프 언어로 새겨져 있다. 드라마스쿨을 졸업하기 이틀 전 <반지의 제왕> 캐스팅 소식을 들은 행운의 젊은이. 세상과 동떨어진 채, 누구도 더럽힐 수 없는 젊음과 그동안 살아온 2천년 세월이 주는 초월을 동시에 담아야 했던 그는 마치 영원의 위험성과 무게를 알고 있는 것처럼 경고한다. “문신을 할 땐 많이 생각해야 해요. 영원히 지속되는 거니까요. 영·원·히.” 중간계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은 오래된 존재 엘프로 열여덟달을 살았고, 유물과도 같은 배우 크리스토퍼 리를 비롯해 많은 선배들과 뉴질랜드를 여행했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숱한 캐스팅 제의를 물리치고 3년 동안 드라마스쿨에 은둔했던 블룸은 천성처럼 타고난 인내를 태고의 용광로 속에서 한층 단단하게 단련시켰다.
블룸은 <슈퍼맨> 속의 슈퍼맨이 사실은 배우 크리스토퍼 리브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전기영화 <와일드>에 단역으로 출연했던 그는 고전적인 골격과 호감을 주는 눈동자 덕분에 기대주로 떠오르는 듯했지만, “내게 필요한 건 에이전트가 아니라 훈련”이라면서 연기학교 교문 안으로 고집스럽게 걸어들어갔다. <갈매기> <트로이 여인들> <십이야> 등이 그 시절 블룸이 출연했던 연극들. 블룸은 꺾이지 않는 기상을 가진 청년답게 <반지의 제왕> 오디션에서 오만한 왕자 보로미르의 대사를 읽었지만, 돌아온 역은 섬세하고 예민하며 흔들리지 않는 심성을 소유한 엘프족의 전사였다. 어떤 면에서 레골라스는 블룸의 육체가 겪은 상처들과는 정반대편에 선 인물이다. 반지원정대와 나란히 고난을 헤쳐나오면서도 홀로 청결한 레골라스와 달리, 블룸은 3층에서 떨어져 불구가 될 뻔했고 갈비뼈와 팔, 두 다리, 손가락, 발가락까지 부러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겹치는 부분도 있었다. 등이 부러져 다시는 걷지 못하리라는 진단을 받았던 블룸은 엘프 여왕 갈라드리엘의 치료약이라도 받은 것처럼 12일 뒤 제발로 병원에서 걸어나왔다. 신의 보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블랙 호크 다운>에서 블룸이 따내려 했던 인물은 헬리콥터에서 추락해 척추를 다치는 레인저 대원. “나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했더니 역할을 줬어요. 정말 행운이 따르나봐요.” 주문을 무시한 웨이터에게 싫은 소리도 못할 만큼 선량한 블룸은 투명한 보호막에 휘감긴 듯 행운 속에 성장해왔다.
비중있는 출연작이라곤 <반지의 제왕>뿐이었던 블룸은 2003년에만 세편의 영화에 주연급으로 등장할 예정이다. 그러나 1년을 더 기다리면 이 미소년의 가치를 확인할 영화를 한편 더 볼 수 있다. 브래드 피트와 에릭 바나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로 대결할 <트로이>는 블룸에게 여신들이 전세계를 뒤져 찾아낸 아름다운 청년 파리스의 자리를 배정했다. 트로이전쟁을 불렀고 여인 치마폭에 싸인 나약한 남자로 경멸받지만 누구도 진심으로 미워할 수는 없었던 파리스. 살아 있는 가장 아름다운 남자 파리스는 레골라스의 금발과 함께 블룸의 빛을 더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