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이런 친구 없을까. 제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망가지도록 술잔을 부딪치며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문득 외딴 섬처럼 쓸쓸해할까봐 지레 위로와 귀여운 주정을 섞어 건네는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의 속깊은(?) 이성친구 준. 까마득한 조직 후배들에게도 무시당하는 강재의 삼류 건달 인생에 그렇게 사느니 죽겠다고 쓴소리, 쉰소리 늘어놓으면서도 친동생처럼 온갖 뒤치다꺼리를 마다않는 <파이란>의 양아치 경수나, 구김살 없는 쾌활함으로 해군 부대원들의 엔도르핀 상승을 책임지는 한편 밉살스럽게 굴던 동기의 죽음에 진정으로 울어주는 <블루>의 박중사 같은, 그런 친구.
공형진(33)은 바로 그런 친구의 체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배우다. 꼭 정색하고 다독이는 것도 아니건만, 툭툭 던지는 진심 한마디가 어쩐지 훈훈하고, 때로는 그저 천진한 장난기와 낙천적인 웃음 자체로 주위의 명랑지수를 한 단계 올리곤 하는 친구. <선물>의 동료 개그맨, <오버 더 레인보우>의 보험회사원부터 최근작 <블루>까지 대부분의 영화에서, 그는 넉살좋은 코미디의 호흡으로 친구 같은 조연을 도맡아왔다. 이미 헤어진 이요원을 따라다니는 <서프라이즈>나 우정 출연한 <울랄라 씨스터즈> <몽정기>처럼 마냥 웃기는 감초로도 제격이지만, 특히 자연스러운 “사람 냄새”가 배어나는 <파이란> <좋은 사람…>은 오래 기억에 남을 법하다. “기왕이면 현실과 밀접한 영화, 되도록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그는, 쇼트트랙 선수 흉내나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진 말투처럼 아주 사소하지만 진짜 같은 일상의 모습에서 천연덕스럽게 웃음을 자아내곤 한다. 코미디가 전부라기보다는, “악한 사람이라고 웃음이 없을까. 코미디든 악역이든, 멜로든 사람이 사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데, 당위성을 가진 인물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사람’은 공형진과 영화가 만날 때도 중요한 척도. “시나리오도 중요하지만, 한 작품 할 때마다 꼭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이 하나씩은 있었으면” 하는 편이다. “영화는 팀플레이고, 같이 호흡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얻기” 때문. <파이란>의 경험도 이를 뒷받침한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허리우드, <스카페이스>는 대한”이라고 지금도 당시 개봉관을 외울 만큼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재수 시절 영문과 지망에서 중앙대 연극영화과로 급선회할 때까지도 배우가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1학년 때 3학년들의 워크숍 <환도와 리스>의 주연으로 발탁된 무대에서, 그는 “눈짓 하나 손짓 하나를 따르는” 관객의 반응에 압도됐다. 그때부터 연극과 영화, SBS 공채 1기로 들어간 TV에서 “10년간 연기를 했다면 해왔는데, 한순간에 와장창 무너진” 게 <파이란>에서 최민식을 만나면서였다. “정말 그 사람이 된 것처럼, 무당같이” 연기하는 그를 보며 지금껏 “흉내만 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눈으로 좇으며 고민했던 <파이란>은, 이날 스튜디오에서 그 O.S.T를 틀자마자 바로 알아들을 만큼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다.
결국 <블루>도, <파이란>의 작가 김해곤의 제안으로 출연하게 된 경우. <더 비치>의 피피섬과 사이판에서 스쿠버다이빙 훈련을 받으며 “왜 아웅다웅하며 살았나” 싶었다는 바다 속 35m의 기억도 좋았지만, 진해의 군부대에서 신현준이라는 배우와 부대끼고 속내를 터놓는 선후배로 남은 게 재산이다. 현재 막바지 촬영을 앞둔 <별>에서는 산 속 중계소 생활에 염증을 느끼다가 좌천된 유오성과 우정을 쌓아가는 통신회사 동료, 6·25전쟁에서 엇갈린 형제의 길을 다룰 차기작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비극적인 운명의 전우로 합류할 예정. 각각 유오성, 강제규 감독이라는 또 다른 대상을 영화의 현장에서 만나는 게 “즐거운 학습”이라며, 스크린 안팎에서 “사람처럼 살게 해달라”는 주문 아래 자신만의 연기의 결을 탐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