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전쟁은 미친 짓이다, <알포인트>의 배우 감우성
2003-03-05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이혜정

감우성에겐 많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었다. 스튜디오가 이렇게 조용했던 적이 있었나 생각해볼 정도로 그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었지만, 한결같은 억양에 실려나오는 그의 이야기는 받아적기만 해도 한 단락을 이룰 것 같았다. 가르치는 일을 좋아했던 탓일까. 동양화를 전공하던 대학 시절 이미 미술학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친절한 선생님이 설명을 해주는 것처럼 자기 삶의 중요한 순간을 가른 두 가지 축, 연기와 그림을 “아, 그런 거였구나!” 싶도록 짚어내곤 했다. 데뷔한 지 10년 만에 영화를 시작한 감우성. 당연하게도 그의 필모그래피엔 <결혼은, 미친 짓이다> 한편만이 호젓하게 올라 있다. 그러나 “여자와 노닥거리는 연기만 하는 데 지쳤다”는 냉소적인 발언 뒤에 “사람을 대할 때는 수백 가지 다른 선택이 있다. 따뜻하게, 친절하게, 반갑게…. 모두들 소름돋는 연기만 바라는데, 일상의 연기가 훨씬 어려운 것이다. 기술만 가지고 하기는 너무 힘들었다”고 솔직하게 덧붙이는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스스로를 정비해온 노련한 배우였다.

영화를 하고 싶다고 자주 말해온 감우성은 첫 번째 영화를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택했다. “잘 팔리는 멜로 연기가 지겨웠다”는 그는 험한 산을 타는 등반가나 사기치는 나이트 삐끼 역도 했지만, 역시 사람들은 <예감> <사랑해 당신을> 같은 드라마에서 보여준 달콤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만을 기억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후 곧바로 출연한 드라마 <현정아 사랑해>가 엄청난 호응을 얻었던 데에도 재벌 2세답지 않게 소탈하고 자상하면서 귀여운 모습을 보여준 감우성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감우성은 연인은 연인이되 지금까지 연기해온 연인의 전형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담고 있었다. 영원 같은 건 믿지 않는 냉소적인 대학강사 준영. 여자를 달래던 감우성의 차분한 목소리가 다소 예민하게 마음을 찌르는 가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감우성이 준비가 될 때까지 영화데뷔를 미루었던 긴 시간이 그만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 능력을 확인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내 능력만큼의 대접만 받기를 바랐다. 능력 이상의 대접을 받으면 그 이후의 시간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건 감우성이 그림을 “당분간” 그만둔 이유와도 비슷하다. 절제된 선을 추구하는 동양화를 그렸던 감우성은 모두가 경쟁적으로 새로운 소재만 찾는 데 회의를 느껴 돌파구로 연기를 택했다. “여섯살 먹은 아이가 선 하나 치는 거나 육십 먹은 노인이 치는 거나 뭐가 다르겠는가. 중요한 건 그 안에 녹아 있는 삶과 경험이다. 경험을 쌓으면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시기가 다가올 거고, 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감우성은 자신의 방법만이 옳다고 고집하진 않는다. 남은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용케 어려 보인다고 해도 40대 후반까지밖에 영화를 찍지 못할 텐데, 영화는 많아야 일년에 한두편 출연할 수 있으니까, 열편 정도 더 찍을 수 있나? 모두에게 이런 방법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단호한 끝맺음에 앞으로는 나이먹은 배우에게도 자리가 주어지지 않을까라는 인사치레조차 건넬 수가 없었다.

이제 행보를 좀더 빨리 하려는 건지, 감우성은 1년 만에 두 번째 영화를 결정했다. 3월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에서 촬영을 시작하는 <R-POINT>는 어느 소대원들이 식민지 시대 격전지였던 로미오 포인트에서 실종된 전우들을 찾아나서면서 겪는 끔찍한 공포담이다. “데뷔작이 <우리들의 천국> 납량특집이었으니까 공포영화와는 인연이 있는” 감우성은 지적이고 예민하지만 소대원들을 모두 잃은 약점이 있는 중위 최태인을 연기한다. 야만적인 전쟁터였던 베트남의 기억을 체화하기 위해 5kg를 감량했고, 피부도 태웠고, 해병대 훈련소에서 훈련도 받았고, 베트남 참전 경험이 있는 장성과 긴 대화도 가졌지만, 감우성은 어쩌면 이 영화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보다 쉽지 않을까 생각한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사람이 하는 행동은 다 비슷할 거다. 나도 한번쯤은 내지르는 연기를 하고 싶었다.” 마침 감우성은 “배우들의 감정전달이 기가 막힌” <디어헌터>를 보고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새벽 두세시쯤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참 재미있었다. 대사 같은 건 현장에서 부딪치는 느낌을 살려 좀더 다듬어야겠지만. 평범한 스릴러였다면 승낙하지 않았을 거다. 전쟁이 배경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어진 사진촬영에서 감우성은 가죽재킷 사이로 드러난 맨살이 신경쓰이는 듯 계속 옷자락으로 가리다가도 어느 순간엔 스스로 팬티 자락을 끌어올리는 파격을 보여주기도 했다. 짧은 시간에 여러 면을 보여준 감우성은, 사람은, 특히 배우는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배우였다. 이제 얼마 뒤면 그는 원인 모를 공포 속에서 홀로 통제력을 잃지 않고자 분투하는 눈빛 날카로운 소대장이 되어, 자신을 덮은 선입견을 벗겨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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