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랗고 빨간 천조각들이 사정없이 누벼진 점퍼는 분명 뜨악한 것이었다. 뉴욕 에섹스하우스 인터뷰룸에서 만난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자신의 사이즈보다 훨씬 큰 요상한 색깔의 점퍼를 입은 채 나타나 악수를 건넸다. 영국 악센트가 섞인 중저음의 목소리나 사려깊고 지적인 대화법으로 보자면 그는 분명 제임스 아이보리 영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신사였지만, 그가 걸친 점퍼는 빡빡 민 푸른 머리와 차가워 보이는 창백한 얼굴빛에 더해져 위험스러운 매혹을 연출하고 있었다.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또다시 커다란 체크패턴의 붉은 옷을 입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들키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민한 소년처럼 그의 마음이 잿빛과 분홍빛 사이를 오간다는 사실을, 카메라 앞이 아니라면 쉬이 드러나지 않는 붉은 불덩이 혹은 푸른 바다가 내면에 함께 한다는 사실을.
“나에게 연기라는 배출구가 허락되지 않았다면 사회에서 내 공간은 없었을 것이다.”
<갱스 오브 뉴욕>의 ‘도살광 빌’을 두고 새삼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겠다. 사람들의 이목이 다시 한번 대니얼에게 집중되어 있긴 했지만 그의 연기는 언제나 경이로웠다.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그 완벽함은 각별한 성실성으로부터 온다.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준비하느라 감옥 독방에 갇혀 며칠씩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았다는 일화나, 체코가 배경이긴 하지만 영어로 대사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위해 체코어를 공부하는 열성, <갱스 오브 뉴욕>을 찍는 6개월 동안 빌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웃었다는 주변의 증언처럼, 그는 매 작품마다 강신(降神)에 가까울 정도로 캐릭터에 몰입한다. 13년 전 <나의 왼발>의 뇌성마비 화가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에 불과할 것이다.
비결은? 영국 영화사의 거목이었던 외할아버지 마이클 발콘과 시인인 아버지 세실 데이 루이스에게서 받은 DNA의 우수성 때문인가? 아니면 런던의 연극학교를 거쳐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에서 다져진 연기의 내실 덕분일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에게 큰 문제가 아니다”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고도로 발달된 자기 기만 능력”이 결합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흠잡을 데 없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연기는 너무 꽉 차서 때로는 숨이 막힌다.
“만약 내가 1년에 3편씩, 두번씩, 아니 한편씩이라도 영화를 찍는다면, 나는 지금부터 연기를 그만둬야 할 것이다. 나에겐 당신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당신의 상상력은 말라비틀어진 땅처럼 공허해질 것이다.”
주로 한 인물의 처절한 삶의 투쟁을 그렸던 짐 셰리던 감독과의 잇단 작업은 그에게 ‘메소드 연기의 달인’이라는 칭송과 함께 ‘참을 수 없는 연기의 무거움’을 선사한 것이기도 했다. 선천적인 뇌성마비를 극복한 화가 크리스티 브라운의 인생역정을 그린 <나의 왼발>부터, IRA가 벌인 폭파사건의 주범으로 오인돼 15년간 복역한 뒤 무죄 석방되는 청년의 이야기를 담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일랜드의 국민적 우상인 권투선수 배리 맥기건의 일대기를 다룬 <더 복서>에 이르기까지, 절망의 끝에 다다랐으나 늘 피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그의 페르소나는 감동적이면서 동시에 버거웠다. 감정의 피스톨은 언제나 최고치까지 치달았고, 그때마다 그는 질펀한 굿판을 끝낸 무당처럼 탈진했다.
“물론 학교에서 메소드 연기를 배웠다. 사람들은 내가 배역에 접근하는데 뭔가 과학적인 단계가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일이란 게 광기의 모험이고 영화 만들기는 일종의 미친 짓이다. 연기는 닥치는 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그냥 직관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혼란 그 자체이며 더러운 오물이다. 물론 표시판이 있긴 하지만 종종 어떤 단서도 없는 상태에 이른다. 이런 몰입은 가끔 자기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완전히 그 배역에 빠져들게 되면 내 역할에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게 맞는지 틀린지 판단할 수도 없을 만큼.”
평소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다작을 하는 배우는 아니었지만 1997년 작 <더 복서> 이후 <갱스 오브 뉴욕>에 이르는 5년간의 공백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가 배우로서 재기할 수 있을지 의심하게 만들 만큼 긴 시간이었다. “배우가 갑자기 연기를 그만두고 스포트라이트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당신의 삶에 무궁무진한 궁금증을 가진다. 그리고 결국 연기를 다시 시작하지 않은 것에 대해 괘씸하게 여긴다.”
그가 5년 동안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답 회피의 전문가”답게 단지 “개인적인 시간에 대해 침범받는 기분이 들어서”라는 모호한 이유를 붙일 뿐이었다. 그는 플로렌스의 구두수선공 밑에서 도제수업을 받았다는 소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두를 기웠든 칼을 갈았든 간에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지난 시간을 분명 새로운 느낌으로 보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갱스 오브 뉴욕>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는 예전 그대로 위대하지만 어딘지 새로운 데가 있는 까닭이다.
“빌은 자기비하로 고통받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다. 그리고 신념은 의심보다 훨씬 삶을 편하게 만든다. 물론 그는 거대한 외로감, 고립감을 짊어지고 있다. 그의 선악에 대해 판단해본 적은 없다. 그는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정말 악당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시대를 놓고 평가할 때 그는 정말 악당이기만 했을까? ”
만약 당신이 지금 막 <갱스 오브 뉴욕>을 보고 극장 문을 나서는 중이라면, 대니얼 데이 루이스에 대한 오싹함이 등줄기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의안을 칼 끝으로 툭툭 치거나 적의 등에 사정없이 도끼질을 해대며 세상 사람들의 공포를 자양분 삼아 살아온 도살광 빌이 아직까지 배우 대니얼 데이 루이스와 분리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잔인한 그에게서 오히려 매력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더라도 놀라지 마시길. 당신은 19세기 맨해튼을 주름잡았던 도살광 빌을 “위대한 미국인으로 죽어간” 하나의 인간으로 받아들여 보듬고 살피고 다독이는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씻김굿에 참여한 것이므로.
항간에는 그가 올 여름에 제작될 레베카 밀러의 영화 <장미와 뱀>에 출연할 예정이라고도 하지만 아직 확정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영화든 무엇이든 간에 나의 호기심을 발동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같은 이유로 “5년을 쉬게 될지 내일 당장 일하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설혹 “내 일생에서 마주쳤던 최고의 위안”이라고 했던 BAFTA 남우주연상에 이어 오스카 트로피까지 그의 손에 쥐어진다 해도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른 새벽 미국 국기를 걸치고 앉아 어쩌면 원수의 아들일지도 모르는 청년을 바라보던 그 복잡하고 허망한 눈빛의 유효기간이 다 가기 전에, 그를 다시 한번 불러앉히고 싶은 욕구는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