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내 왼손이 곱다구요?그럼 오른손을 보세요,배용준
2003-03-19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정진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라는 드라마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껏 자존심을 세우며 돌아선 윤손하가 화장을 고치는 척 콤팩트 거울을 꺼내더니 뒤돌아가는 배용준을 슬쩍 훔쳐본다.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걸어가던 배용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읇조린다. ‘거울로 나 봤지? 그래, 오늘은 그걸로, 만족해….’ 이 장면을 보면서 배용준에게 저런 면도 있구나, 잠시 놀랐던 것 같다. 모범생에 반듯한 성품으로 누군가를 지고지순하게 사랑하거나,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는 역이라면 모를까, 저렇게 머리 굴리며 사랑을 시험대에 올리는 그는 쉽게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라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후로 오랫동안, 그는 우리의 상상력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정답만 나오는 역할 사이를 오고갔으니까.

그러던 올해 초, 배용준이 데뷔 10여년 만에 영화를 찍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영화는 사극이라 했고, 장안의 여자들을 섭렵해 나가는 천하의 바람둥이 역할이라고 했다. 도대체 이 사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겨울연가>의 인기가 증명해주었듯 25인치 TV 안에서도 충분히 행복할 그가, 왜 안경을 벗고, 왜 상투를 틀며, 왜 부드러운 말투를 버리려 하는지. 왜 이제 와서 ‘착한 남자’의 온실에서 벗어나려 하는지. 그러나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 속에서 난생처음 이 배우가 궁금해졌다. 무모하거나 혹은 용감한 그가.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뭘 찍고 있는지, 잘 찍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도포자락 휘날리며 다가오던 배용준이 소파에 털석 주저앉으며 말한다. ‘아니, 글깨나 읽으신 선비가 어찌 그런 것도 모르시오.’ 갑자기 이런 농담을 날리고 싶은 것을 꾹 참는다. 물론 이재용 감독에 대해 “처음부터 믿음이 갔어요”라고 말할 때나, 자신의 팬들은 “처음 사랑 끝까지”변함없다며 고마워할 때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소리없는 미소, 자로 잰 듯 딱 거기까지만 뻗어져 올라가는 입의 크기, 웬만해선 침착함을 잃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예의바른 태도, CF카피로 써도 될 만큼 늘 정돈된 말투. 이렇듯 배용준의 첫인상은 예상하던 대로였다. 물론 “시나리오를 보다보니 살이 있으면 안 될것 같아서 7kg 정도 감량했다”는 그의 얼굴에 갈색으로 휘날리던 ‘바람머리’ 준상이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쭉 같은 학교를 다니던 남자아이가, 고등학교에 와서 처음 말을 건넨다면 이런 기분일까? 90년대 초 드라마에서 처음 ‘사랑의 인사’를 건넨 10년 뒤, 이재용 감독의 신작 <스캔들- 조선시대 남열 상열지사>의 촬영현장에서 이루어진 그와의 첫 번째 조우는 익숙함과 생경함이 뒤섞여 있었다.

“왜 갑자기 영화를 찍겠다고 생각했나요?” “갑자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거였는데, 늘 인연이 안 되서 포기하곤 했어요. 충무로는 언제나 빨리 돌아가야 하는 곳이었지, 언젠가 가보아야 할 곳은 아니었어요. 왜냐면 시작이 영화였으니까요. 92년에 합동영화사에서 제작부 막내로 일할 때에도 무엇이 되든 간에 내 꿈은 영화 일을 하는 거였어요.” “안경을 벗고, 상투를 트는 사극연기에, 바람둥이 역할이라니, 모험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요. 큰 결정이었어요. 어렵고 쉽고를 따지기 이전에 나중에 넘어야 할 산인데 처음부터 넘으려고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사실이에요. ‘왜? 뭐 때문에?’ 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래, 너답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산을 넘으면 조금은 수월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주변에서 떠드는 것처럼 안경을 벗는 건 오히려 큰일이 아니었어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이상 이렇게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제는 정말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나를 계속 괴롭혔던 것 같아요. 스타가 아니라 배우로 불리고 싶다는 것이 이런 욕심을 가지게 된 출발점이겠죠.” 이제 그에게 목도리 매는 법을 묻지 말자. 어떻게 말을 타고, 어떻게 검을 쓰고, 어떻게 춘화를 그리는지를 물어보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거죠, 나 대신 누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되겠다는 건 알겠는데 절대로 그렇게는 안 되고…소리라도 지르고 싶고, 이게 아닌가봐 아닌가봐, 해봐도 답은 안 나오고….” 이제 10여회차 넘어간 촬영 동안 배용준은 10년 동안 느꼈을 연기의 어려움을 한꺼번에 겪었다. “시나리오 재밌어, 이미숙 선배에 전도연씨까지 배우들 휼륭해, 감독 믿음이 가죠, 재고의 여지가 없었어요. 상투를 트니까 힘들겠다, 옛날 말투가 힘들겠다, 이런 디테일에 대한 걱정은 하나도 안 했던 셈이죠. 그냥 죽기 살기로 해보자 했는데… 와, 그런데 이거 촬영 들어가니까 죽겠네요. 이렇게 어려울 수가, 이렇게 어려울 수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연기를 못했었나 느껴지더라구요.” 게다가 여전히 배어 있는 TV연기 습성은 끊임없이 그를 방해했다. “카리스마가 있으면서 자기감정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는, 그러면서도 능청스럽고, 장난기 있는” 희대의 바랑둥이 조원을 연기하기엔 그의 표정이나 말투는 여전히 “너무 부드럽고, 너무 착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안 하던 연기잖아요….” 꽉 조여맨 상투 때문에 이마에 피멍이 들고, 따끔거리는 수염 때문에 갑갑해도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가슴을 퍽퍽 치며 괴로워하는 원인은 다른 데 있었던 거였다. “며칠 전 이미숙 선배랑 촬영하는데 “지금 가슴으로 안 느꼈어, 다시 해봐” 그러시는 거예요. 난 분명히 가슴으로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야기 듣고 다시 해보니 조금 다른 느낌이더라구요.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고 배워나가겠죠. 이제는 인기가 쌓이고 타인의 평가를 받는 것만이 아니라, 운동에서 1단, 2단 따올라가듯 보이지 않는 내 만족도에서 연기의 단을 따나가야 한다는 걸 알겠어요.” 학생이란, 내 상태를 인정하고 기꺼이 새로운 깨달음을 받아들일 자세가 된 사람을 일컫는 것이라면, 그는 당분간 학생으로서 행복할 것 같다.

극중 조원이 조씨 부인(이미숙)의 다리를 슬며시 쓸어올리는 장면, 배용준의 손이 모니터에 클로즈업된다. 희고 얇은 손가락이 여자손보다 훨씬 곱다. “손이 참 예민하게 생겼다”고 했더니 그가 불쑥 오른손을 내민다. 그것은 모니터 너머로 보던 곱디 고운 왼손과는 많이 달랐다. “이런 손도, 저런 손도 다 나한테 달려 있는 내 손이에요.” 그동안 우리는 그의 한손만 보아온 건지도 모르겠다. 10년 동안 따뜻한 아랫목에서 사랑받던 그가 제 발로 충무로 거친 들판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제 나머지 오른손을 내민다. 일단 한번 잡아보자. 믿고 잡아도 후회없을 손일지, 썩은 동아줄일는지는 몇달 뒤 그가 스스로 증명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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