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내가 좋아한 책은 되도록 다시 읽지 않는다. 무영탑의 그림자와 같이 드리워진 감상이 말짱해질까 두려워서다. 고교 때 재미있게 읽었던 책 가운데 서머싯 몸의 <달과 6 펜스>가 있다. 처음으로 읽은 영어로 된 책이기도 했다. 방황의 시절에 하나를 이미 발견하고 만사불구 그 길을 가는 것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고갱의 삶이 모델인 이 소설을 이후엔 다시 읽지 않았다. 직업으로 인해 소설도 줄을 치며 읽는 고질병이 생겨, 원초적 기쁨의 하나를 양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타히티와 같은 동양의 땅에 서양 사람이 와서… 운운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더더욱 그랬다.
<파리, 텍사스>를 본 것은 1980년대 말 우리나라에서다. 이 영화만은 예외여서 5년이 지난 뒤 텍사스에서 다시 보았다. 텍사스 하면 무법천지 내지 <달라스>에서와 같이 일확천금이 우선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요즘엔 부시가 먼저 떠오를까?
영화의 포스터는 핍쇼장면을 강조한 듯 기억되지만, 실제 영화는 먼저 기타의 저음부가 흔들리듯 여운을 남기는 음악으로 다가왔다. 마치 황량한 텍사스를 배경으로 한 서부영화에서의 음악과 닮은 듯 다른 울림이었고, 다음으로 다가온 것은 메마른 땅과 타들어가는 덤불들. 영화가 시각으로 다가오는 것 같지만 이미지의 음과 여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인공 트래비스의 기억의 공백 또한 그만큼 여운을 만들어내면서 공명하고 있었다.
감독 빔 벤더스의 말대로 텍사스는 미국의 축소판일 수 있다. ‘파리’와 ‘텍사스’는 ‘유럽’과 ‘미국’의 본질을 구현하면서 괴물스런 오늘의 삶을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를 너무나 줄을 치며 읽는 것이다. 실제로 텍사스에는 ‘파리’의 영어식 발음인 ‘패리스’가 있다. 댈러스에서 동쪽으로 한 시간 거리쯤인 것 같다. 텍사스에는 19세기에 유럽의 많은 민족이 집단으로 이주해와 정착한 지역이 많다. 그래서 어떤 곳엔 독일 마을이, 어떤 곳엔 체코나 폴란드 마을이 있다. 동쪽으로 이웃하는 주(州)인 루이지애나에 나폴레온이라는 마을을 지날 때 물어보니, 정말로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 그의 부하가 세운 도시라 했다. 텍사스에도 프랑스에서 집단으로 이민을 온 역사가 있지만 흩어져버려 자취를 찾기는 힘들다. 패리스 역시 이러한 역사의 일부가 아닌가 한다. 텍사스에서 파리의 기억은 패리스로 이어간다.
한번쯤 가보려고 했지만 포기했다. 한편으로는 식구 중 한 사람이 가봐야 다른 곳과 다를 바가 없다고 우겨서였지만, 어느덧 나 역시 굳이 가서 확인하는 것이 내키지가 않았다.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어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좋아했던- 너무나 난해해서 괜스레 그랬겠지만-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가 사물의 혼돈과 질서를 노래한 시의 배경인 키웨스트라는 플로리다의 최남단 역시 무척이나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곳은 헤밍웨이의 거처로도 유명하지만. 내가 언급해서였는지 절친한 이웃이 그곳을 다녀와 비디오로 찍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키웨스트로의 여행을 포기했다.
리모컨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본다면 <파리, 텍사스>는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영화이다. 깨져버린 가족관계와 좋거나 고통스런 기억들, 핍쇼로 대변되는 미국에 대한 판타지와 그 실상, 자연과 도시 속 모두에서의 소외 등등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기억의 깨어짐을 말하려는 것으로 나에게 다가왔었다. 이제는 깨져버린 기억만이 뒹굴어 남기는 여운의 황량함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기억으로 샹송 <파리의 하늘 밑>이 들려주는 시절을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트래비스처럼 텍사스에서 파리를 만들고 기억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기억과 망각의 여백 속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순간이 아지랑이처럼 오르면서 우리의 삶을 띄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