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쇼 비즈니스를 아는 로맨티스트,리처드 기어
2003-04-09
글 : 박혜명

‘귀여운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지만 그걸로 부족했던 모양이다. 시카고의 넓은 무대 위에서 리처드 기어가 무엇인가 보여주고 있다. 특별 교습 5개월이 키운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긴 어렵겠지만, 쉰넷이라는 가볍지 않은 나이로 무대 위를 쿵쿵 구르며 노래하는 그를 관객이 알아주지 않는다면 당연히 서운할 것이다. 감독 롭 마셜과의 첫 미팅에서 그는 “이 영화 대본이 정말 맘에 든다. 다른 건 문제가 안 되는데, 탭댄스를 춰 본 적이 없다”며 “하지만 일단 두고 보자”고 했고, 온 신경이 거꾸로 서는 기분을 느껴가면서 연습했다. 30년 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그리스>의 주연으로 프로필 첫줄을 쓴 그는 배우로 제 길을 찾기 이전에 록 뮤지컬과 소박한 오페라를 몇편 했었지만 그래도 <시카고>는 “탭댄스 구두에 적응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고 찍는 동안 수없이 좌절했던” 작품이다.

젊은 시절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나 <사관과 신사>를 통해 섹시하고 매력적인 청춘으로 곱게 다듬어진 리처드 기어는 자신의 기본 골격 위에 <귀여운 여인>이 입혀준 세련된 귀공자의 겉옷을 벗은 적이 없다. 그 이후로, 새로운 캐릭터와 조우하기보다 안정된 연기력만 재확인하던 그는, 달콤한 로맨스를 부양해온 눈웃음이 그의 최후를 지킬 유일한 재주인 양 굳어져갈 무렵, 자기 내면의 모호함과 야비함을 조용히 소환했다.

그리하여 <언페이스풀>은 관객이 그를 새롭게 보는 기점이 됐다. 작품 자체는 에이드리언 라인의 초기 명성을 여전히 따라잡지 못했지만 리처드 기어의 ‘에드워드’는 지금까지의 그를 능가했다. 그의 설명을 빌려 “‘그날 바람이 불었다는 절대적 사실’과 ‘섬너 부부 사이에 친밀감이 부족했었다는 상대적 사실’의 혼합 작용으로 발생한 문제”가 인간 심리를 뒤흔드는 과정이 그의 소심연약한 표정을 군더더기도 모자람도 없이 적셨다. 감독은 그가 살이 더 쪄서 지극히 평범한 50대 남자의 전형이 될 것을 요구했으나, “그건 영화에 도움이 안 되는 거였다. 이야기가 당연해져버리니까. 내가 살을 찌우면, 코니가 이 늙고 뚱뚱한 남자보다 더 젊고 섹시한 남자에게 가버리는 것도 당연한데, 영화가 말하는 핵심은 그게 아니다.”

여기서 그의 현명한 생각에 놀라는 건 새삼스럽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티베트 불교로부터 얻은 동양철학과 지성의 세계 그리고 티베트의 중국 독립 및 인권을 옹호하는 공공연한 발언으로, 출연작들의 평균 별점을 떠나 자신의 입지를 다시 한번 차별화한 인물이다. 인터뷰어를 곤란하게 할 만큼 모호하고 복잡한 그의 말들은 곧 리처드 기어라는 인물 자체의 모호함과 복잡함을 대변한다. 배우로서 밟아온 블록들이 죄다 비슷한 색깔 일색이라고 해서 인간적인 면모도 단조로울 거라고 추측하는 건 스크린 속 배우를 동경하다 못해 우리 스스로가 종종 자초하는 오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리처드 기어는 “내가 나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데 기자들이 끊임없이 나에 관해 물어보는 건 정말 아이러니다. 왜 내가 나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건가?”라고 불평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자선단체의 오랜 후원자였다는 사실에도 놀랄 필요는 없다.

<시카고>의 영악한 변호사 빌리 플린에 던진 리처드 기어의 주사위는 또 한번 의외의 숫자를 드러낸다. 빌리의 첫 노래 <All I Care About>은 여자와 사랑이 있다면 돈도 필요없다는 가사를 내용으로 하지만, 그가 숨긴 2절 가사는 필시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돈이야’였으리라. 목숨이 달린 재판을 앞에 두고 부들부들 떠는 록시에게 “이것도 서커스고 모든 게 서커스야. 그게 쇼 비즈니스지”라고 태연자약하게 말하는 빌리 플린은 분명히 쇼 비즈니스 그 자체인 도시 시카고에서 세상과 돈에 닳고 닳은 변호사다. 그것은 또한 장르의 규칙 속에서 제법 안전하게 살아온 리처드 기어의 일면이기도 하다. 변화를 겪되 그 신중한 보폭은 여태까지 그의 매력적인 은발 한 가닥 흐트러뜨린 적이 없었다. 똑똑하고 생각많은 복잡한 인간이면서 관객의 사랑을 잃지 않는 가장 쉽고 단순한 방법을 아는 남자. 그러므로 대중은 1999년 <피플>이 인정했듯 “생존하는 가장 섹시한 남자”이면서 머시멜로 같은 부드러움을 지닌 배우 리처드 기어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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