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한 신인감독 봉준호(34)가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 <살인의 추억>(제작 싸이더스)을 들고 25일 관객을 찾는다. 15일 시사회를 마치고 기자들과 마주한 봉감독은 기자들의 호평에 고무된 표정을 지으면서도 "기자들이 좋다고 하면 관객이 안든다던데…"라며 흥행에 대한 부담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앉은 주연배우 송강호가 "봉감독은 9회말 투아웃 타석에 들어선 충무로 4번타자"라고 치켜세운다.
"실제 사건을 스크린에 옮기려니 부담이 많았습니다. 피해자 가족과 용의자로 몰려 고생했던 사람은 다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고 형사들도 실패담을 새삼 꺼내는 게 괴롭겠지요. 저는 너무도 빠르게 변하는 세태가 안타까워 영화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도 벌써 많은 사람의 뇌리에서 잊혀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기억하는 것 자체가 범인에 대한 응징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그는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범인을 꼭 만나고 싶었다고 한다. 당신이 죽인 여자를 아직도 기억하는지, 지금은 행복하게 지내는지 물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찾아올까봐 겁나기도 했다. 한밤중에 불쑥 찾아오는 과대망상에 시달리기도 했다.
영화는 서울에서 파견된 형사와 현지 토박이 형사의 대결구도로 짜여져 있다. 형사 버디 무비에서 익히 보던 상반된 캐릭터지만 둘이 의기투합해 사건을 멋지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된 실패를 겪으며 점차 상대를 닮아간다.
피살자를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보통의 스릴러 영화에서 시체는 미스터리 퍼즐을 위한 도구로만 쓰이는데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살해되는 여중생은 형사와 짧은 순간이지만 깊은 교감을 나눈다.
"여느 추리물과는 다르게 표현하려고 애썼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게 주위 사람에게 얼마나 큰 슬픔을 주는지 말하고 싶었지요. 형사도 트렌치 코트 깃을 세우고 담배 연기를 내뿜는 스테레오타이프에서 벗어나 실제로 주변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인물로 그려냈지요."
사건의 무대는 80년대 후반의 농촌. 영화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을 보면 경찰들이 연쇄살인사건에 그토록 무기력했던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경운기 바퀴가 중요한 단서인 범인 발자국을 뭉개고 지나가는가 하면 전경 2개 중대만 보내달라는 강력반장의 요청도 반정부 시위 때문에 묵살당하고 만다.
"자료 수집을 하기 위해 국회 도서관에서 당시 신문을 들추다보면 `아시안게임 개막' 등의 기사가 눈에 뜨입니다. 제 기억 속의 80년대는 `동원의 시대'였습니다. 국가와 사회가 외부 행사에 신경쓰다보니 민생치안을 돌볼 겨를이 없는 거지요. 형사의 무능함보다는 시대의 조악함 때문에 범인을 못잡았다고 봅니다."
연세대 사회학과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봉감독은 습작 시절부터 일찌감치 기대주로 주목받았다. 16㎜ 단편영화 <프레임 속의 기억>과 <지리멸렬>은 94년 밴쿠버와 홍콩 영화제에 초청받았고 2000년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로 홍콩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상과 뮌헨 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보러올지도 모를 범인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묻자 "하루빨리 자수해서 벌을 받기를 바란다"는 교과서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