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오베르뉴 지역에 있는 영화 속의 학교는 단 하나의 학급으로 이뤄져 있다. 전교생이라고 해봤자 고작 열세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학교에서 저학년에서 고학년에 이르는 모든 학생들은 한 교실에서 조르주 로페즈 선생님과 함께 공부한다. 영화는 2000년 12월부터 2001년 6월까지 7개월 동안 이 학급에서 일어난 작은 일들을 뒤쫓아가 만들어졌다.
■ Review우리의 기억 속에는 영화 속에서 교사로 등장해 깊은 인상을 남겨줬던 인물들이 꽤 여럿 있다. 당장 기억 속에서 몇명만을 불러오자면,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문제아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고자 했던 <언제나 마음은 태양>의 풋내기 교사 마크(시드니 포이티어)나 나름의 방식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참다운 인생에 눈뜨도록 도움을 주었던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이제 <마지막 수업>이란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또 한 사람의 기억할 만한 영화 속 교사 한 사람을 더 추가해도 좋을 것 같다. 바로 이 영화 속의 초등학교 교사인 조르주 로페즈를 말이다.
비록 그는 앞에서 언급한 마크나 키팅처럼 연기자가 만들어낸 허구 속의 인물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찍는 카메라 앞에 몸을 내맡긴 현실 속의 인물이고 그런 만큼 앞의 인물들처럼 매우 드라마틱한 상황 속에 놓여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도 무언가 영웅적인 행위를 수행해내는 인물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픽션을 대할 때와 논픽션을 대할 때는 그 태도상의 차이가 분명 존재하는지라 결코 ‘영웅적’이지는 않지만 교사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지닌 ‘실존’하는 인물 로페즈 선생을 스크린을 통해 지켜보는 건 특별한 영화적 경험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한번 나오는 인터뷰 장면에서 이야기하듯이, 프랑스 오베르뉴 지역의 한 초등학교에 20년째 재직하고 있는 로페즈는 가르친다는 것을 정말로 좋아하고 그것을 자기 삶 자체로 끌어안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이건 무엇보다도 그가 어린 학생들을 지도하는 진실한 태도로부터 자연스레 드러난다. 로페즈는 아이들에게 단지 받아쓰기와 셈하는 법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규칙을 어기는 아이에겐 마땅한 처벌도 내려야 하고 싸운 아이들을 화해시키기도 해야 하며 또 아이들의 사연도 들어줘야 한다.
아이들의 교육에 필요한 이 일들을 해나가는 데 로페즈 선생은 항상 조용하지만 애정이 깃들어 있는 목소리로 아이들을 이끌어간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고 또 그것에 충실한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런 그가 이제 그만 교직을 그만둘 때가 되어 방학을 맞아 아이들을 떠나보내며 눈가에 눈물을 보일 때, 보는 이의 가슴에 조용히 스며드는 감정의 파장은 자연스럽다고 표현해도 좋을 반응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아무리 로페즈 선생이 그의 작은 학교를, 그리고 그 학교에 대한 다큐멘터리영화를 ‘조직’해가는 데 비중이 큰 역할을 하는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학교의, 그리고 이 영화의 유일한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요컨대 <마지막 수업>은 훌륭한 인물로서 로페즈의 초상을 그리는 영화가 아닌 것이다. 그도 물론 잘 알고 있을 테고, 또 영화를 만든 니콜라 필리베르 감독도 이미 인정했을 것 같은, 새롭지는 않지만 중요한 사실은 교육이란 교사 혼자 이끌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학생들이 함께해 나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마지막 수업>은 교사와 학생들이 만나 관계를 맺으면서 진행되어가는 교육의 과정을 어떤 거창한 목적을 세우지 않고 다만 꼼꼼히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서는 놀랍게도 픽션에서는 느낄 수 없는 종류의 은근한 재미와 감동을 기어이 빚어내고야 만다.
그래서 영화는 아이들 역시 카메라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이런저런 저마다의 개성들을 가진 영화 속 아이들은 로페즈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이제 막 성장의 ‘에트르’(etre)와 ‘아부아’(avoir), 다시 말하면 앞으로 오랜 시간 이어질 교육과 성장과정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영화의 원제는 <에트르 에 아부아>인데 여기서 에트르와 아부아는 활용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두 가지 동사, 즉 영어의 ‘be’와 ‘have’에 해당하는 단어들이다). 내레이션 같은 설명을 위한 전형적인 다큐멘터리 장치를 이용하지 않는 다큐멘터리영화인 <마지막 수업>은 교육 시스템의 문제라든가 제언 같은 이른바 ‘문제’들을 설명하고 논증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다만 교사와 학생들이 만나 관계를 맺으면서 진행되어가는 교육의 과정을 어떤 거창한 목적을 세우지 않고 다만 꼼꼼히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서는 놀랍게도 픽션에서는 느낄 수 없는 종류의 은근한 재미와 감동을 기어이 빚어내고야 만다.
적절한 배경과 인물들을 찾아낸 필리베르 감독의 끈기와 상황을 들여다보고 카메라에 담아내는 그의 애정의 시선이 잘 결합되어 만들어진 <마지막 수업>은 다큐멘터리영화는 대중적이지 않다고 하는 속설을 배반하는 영화였다. 영화는 지난해 프랑스에서 무려 170만명에 이르는 관객을 극장에 끌어들여 지금껏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다큐멘터리영화의 지위에 올랐다. 한편으로 <마지막 수업>은 칸영화제, 뉴욕영화제 등에서 상영되며 평자들로부터도 치료적 효과를 가진 진정한 인간적인 만남이란 식의 너른 호평을 받았다.
:: 니콜라 필리베르의 영화세계박물관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지막 수업>을 만든 프랑스의 베테랑 다큐멘터리스트인 니콜라 필리베르(1951∼)는 이 세상의 영화감독들은 두 종류로 나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즉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믿는 감독과 그렇지 않은 감독이 있다는 것이다. 필리베르는 이 가운데 전자의 입장에 서서 자기가 보는 세상을 스크린 위에 재현해내는 영화를 만들려 노력하는 영화감독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필리베르는 1978년 제라르 모르디아와 함께 12명의 행정관에 대한 첫 장편다큐멘터리 <주인의 목소리>를 발표했다. 필리베르의 1990년작인 <루브르 시티>는 제목에서도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유명한 루브르박물관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이것은 루브르박물관 내의 예술작품들을 카메라로 담아놓은 미술 관련 영화는 아니다. 여기서 필리베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박물관 내의 예술작품들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영화는 박물관 ‘뒤편’에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이런저런 다양한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루브르라는 하나의 도시를 (재)‘발견’해내 그 미지의 면모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루브르박물관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필리베르는 뒤에 국립자연사박물관의 동물전시실로 카메라를 가져갔다. 이 동물전시실은 19세기 말에 개관한 뒤 1965년에 문을 닫은 상태였는데, 이것의 복원작업이 1991년부터 1994년 사이에 일어났다. <애니멀스>(1994)는 그 복원기간 동안에 만들어진 것으로 어떤 복잡다단하고 또 흥미로운 작업과정을 거쳐 전시실의 복원이 이루어졌는지를, <루브르 시티>와 유사하게 섣불리 설명이나 논증을 하려고 하지 않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카메라에 담아낸다.
1992년작인 <들리지 않는 땅>은 <마지막 수업> 이전에 만들어진 필리베르의 영화들 가운데 국제적으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에 속한다. 영화는 듣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담았다. 그러면서 필리베르는 이 사람들에 대해 값싼 동정심을 보여주는 식의 감상주의를 철저히 배제하려 한다. 그건 필리베르 자신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비정상성이 아니라 ‘특수성’ 때문에 그들 스스로의 ‘문화’를 형성해낸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걸 깨달은 필리베르는 바로 이런 입장에서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한편 <가장 작은 것>(1996)에서 필리베르가 만난 사람들은 ‘라 보르드’라는 정신과 클리닉의 스탭과 환자들이다. 영화는 이들이 연극 공연을 하기까지의 소소한 과정들을 관찰한다. 아직까지 우리에겐 미지의 이름이기만 했던 필리베르라는 다큐멘터리스트는 세상의 작은 것들에 대한 관심을 시적인 시선으로 쓰다듬는 예민한 관찰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