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에게>에서 간호사 직업을 가진 주인공 베니그노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는 알리샤는, 그닥 섬세하지 않은 얼굴 윤곽에도 불구하고 선한 눈매와 미소로 그리고 무엇보다 말을 할 줄 아는 육체로, 충분히 사랑스럽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알리샤에게 베니그노는 계속해서 말을 건다(이 영화의 영어 제목 <Talk to Her>는 극중에서 베니그노가 자주 반복하는 대사이기도 하다). 자신의 환자이기 이전에 오래 전부터 그 뒷모습을 바라봐온 사랑의 대상인 알리샤에게 베니그노가 건네는 사소한 대화들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대꾸도 없는 그녀 앞에서 그대로 부서질 것 같지만 오히려 그녀의 몸 구석구석으로 빨려들어간다. 알리샤 역을 연기한 레오노르 발팅은, 실 한 가닥 얹지 않은 몸을 종종 그대로 드러내면서 연인의 말을 모두 알아듣는 듯한 뇌사 환자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줬다. 한눈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미묘한 몸짓과 뭐라 단정짓기 어려운 섬세한 표정으로.
영화의 거의 대부분을 누워 있어야 하는 알리샤 역은, 발팅 스스로의 말처럼 ‘편안하고 무덤덤한 연기’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대로 끝났다면 이 영화가 하려고 했던 많은 말들도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사람의 말은 많은 것을 전달하지만, 뇌사 상태에 빠진 사람이 누군가의 말을 들으며 보이는 미묘한 반응들은 ‘그녀에게 말하는’ 이 영화가 기다리는 대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리샤의 역할은 배우에게 엄청난 부담이었다.
뇌사 상태를 어떻게 연출해야 좋을지는 감독조차 잘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발팅이 그저 죽은 척 누워 있기만을 바라지 않았고, 알리샤의 몸은 조각같이 그리고 동시에 살아 있는 연못같이 보여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발팅은 무의식 상태에 있으면서도 많은 것을 표현하는 ‘시체를 연기’하기 위해 촬영에 들어가기 전 몇 개월간 엄격한 요가 수업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요가 수업은 죽은 듯 가만히 누워 있는 환자로 지내야 하는 3개월을 참는 데도 도움이 됐다. 베니그노 역을 맡았던 상대배우 하비에르 카마라도 발팅에게 큰 도움이 된 사람이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겁이 난다. 소리로 많은 걸 듣고 알아채긴 하지만 나도 누군가를 만지고 싶다”고, 역할이 주는 부담과 불안함을 내비친 그녀에게 카마라는 “걱정하지 마라. 내가 여기 있어주겠다”고 했다. 감독도 그에게 그녀와 끊임없이 대화를 하도록 주문했고, 그건 베니그노가 알리샤의 몸을 돌보는 장면에서 수많은 애드리브로 표현되었다.
1975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레오노르 발팅은 93년부터 TV시리즈와 영화로 배우의 이력을 갖기 시작했다.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되기도 한 <마르티나>는 그전까지 조연에 머물렀던 그가 본격적으로 주연을 맡기 시작한 영화다. 그는 이 영화에서 전남편을 잃고 재혼한 여인 마르티나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사랑을 다시 만난 기쁨과 그 기쁨을 허락하지 않는 현실의 구속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많은 말과 많은 눈물과 많은 몸짓으로. 그때 그녀의 육체는 남자들을 긴장시키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제 그는, 말도 눈물도 교태도 아닌 오직 미세한 동작만으로 마르티나보다 더 풍부하게 누군가의 말에 대답한다. 혹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