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영화 대담] 누아르 범죄영화로 관심몰이, 박찬욱- 봉준호 감독
2003-04-26
정리 : 김영희 (한겨레 기자)
정리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한사람이 미치니까 한국영화 좋아지네”

박찬욱(40·오른쪽) 감독은, 지난 25일 개봉한 봉준호(34·왼쪽)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과 구원이 있다. 3년 전 <공동경비구역 제이에스에이>를 개봉할 즈음에 <살인의 추억> 원작인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와요’를 영화로 만들 생각을 하고 판권을 사러갔다가, 이미 봉 감독이 채간 뒤라는 걸 알았다.

대신 박 감독은 <복수는 나의 것>을 찍었고, 다음달부터 동명의 일본만화를 각색한 <올드 보이>의 촬영에 들어간다. 박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만화 ‘<올드 보이>가 재미있어서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말을 봉 감독으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올드 보이>를 자신이 찍는 건 일종의 복수인 셈이다. 두 감독은 서로 친한데다, <복수는 나의 것>과 <살인의 추억>은 최근 한국영화에서 드물게 누아르 분위기의 범죄영화라는 공통점이 있다. 여러모로 할말들이 많을 것 같은 두 감독이 지난 22일 만났다.

내가 먼저 찜했어

봉준호 | 그것부터 해명하고 가자. <살인의 추억>이 <올드 보이>하고 엇갈린 건 아니잖아. <복수는 나의 것>하고 엇갈린 거지. 나는 <올드 보이> 영화화하려고 안 했어. <복수…>처럼 유괴를 소재로 시놉시스를 쓴 게 있었지.

박찬욱 | 유괴를 영화화하겠다는 건 변영주 감독 아니었어

봉 | 변 감독도 그랬지. 그때 변 감독하고 박치기 난다고 해서 피했던 거지.

박 | <공동경비구역 …>의 김상범 편집기사가 이전에 한 제작자하고 희곡 ‘날 보러와요’의 영화 각색작업을 했었어. 그런데 흐지부지됐고, 그래서 내가 해볼까 알아봤더니 바로 며칠 전에 봉 감독이 찜한 거야.

봉 | 정지우 감독도 ‘날 보러와요’에 관심을 가졌었지. 난 판권을 떠나서 따로 내 식으로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찍을까 했지만 연극 원작이 워낙 매력적이더라고.

박 | 이렇게 며칠 차로 운명이 엇갈리다니.

감독이 달랐다면

박 | 내가 감독했다면 참 다른 영화가 나왔을 거야. 일단 제목부터 다르겠지. 나 같으면 그 마을 허수아비에 새겨진 글귀 있잖아.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 그걸 쓰지 않았을까. 마지막도 2003년에 박두만 형사(송강호)가 나오는 게 아니라 진범이 나오도록 했을 것 같아.

관객이 처음 보는 아저씨가 나와서 희고 고운 손으로 복숭아를 깎아 먹으면서 끝나는. <복수는 나의 것>도 마지막에 관객이 처음 보는 사람이 등장하잖아. 그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확신이 안 서서 그때 봉 감독한테 물었잖아. 그랬더니 너무 좋다고 했다고. 나중에 류승완 감독이 그러는 거야. 봉준호 말 듣지 말라고. 자기 같으면 절대로 그렇게 안 찍을 사람이라고(웃음). 아닌 게 아니라 <살인의 추억> 봐봐. 자기는 이렇게 상업적으로 만들면서.

봉 | 형이 <살인…> 시나리오 읽었을 때 진범이 나오는 엔딩을 말했잖아. 그렇게 할까 생각도 해봤는데 범인을 어떻게 연출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더라고.

박 | 내가 ‘날 보러와요’에 관심을 가졌을 때는 사실 영화의 3분의 2는 희곡대로 가고, 나머지 3분의 1은 내 나름의 추리로 범인을 잡는 이야기를 할까 했었어.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끝나는 영화는 내 머리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라서. 범인이 안 잡히는 건 좋은데, 누군지도 모르고 끝나면 관객이 화내지 않을까. 그런데 영화를 보니까 걱정과 달리 화가 안 나더라고.

봉 | 그게 부담스러웠지. 하지만 어차피 영화가 미스테리 스릴러도 아니고, 장렬하게 범인을 죽일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 시대 사회상이나 형사의 폭발하는 감정에 치중하자, 그러니까 오히려 범인이 안 잡히는 게 더 뜨거운 설정이 되더라고. 허구를 만드는 건 생각도 안 했고. 이건 못 잡는다. 못 잡는 것 자체가 장렬한 패배이고, 왜 패배했는지를 짚어보는 영화다, 그렇게 생각했지.

박 | 난 어려서 탐정소설 애호가였고 이 영화 만드는 과정에서 나 자신이 탐정이 돼보려고 한 거야. 자료는 많이 있을 테니까. ‘안락의자 탐정’이랄까. 서재에서 자료 가지고 범인을 추리해보는 그걸 해볼려고 했지.

봉 | 나도 초기엔 과대망상적인 포부가 있었어. 최소한 <제이에프케이>처럼 범인을 지목하고 코멘트하는 영화는 될 거라는. 그런데 조사할수록 더 모르겠더라고. 나중엔 못 잡는 게 핸디캡이 아니라 강점이라고 생각을 바꿨지.

박 | <살인 …>의 전후반부를 굳이 비교하면 앞이 뒤보다 재미있어. 서태윤 형사(김상경)가 전면에 나서기 전까지. 지금 영화 자체로 충분히 걸작이지만 애초에 박두만이 혼자 주인공인 영화로 가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송강호가 너무 잘해서 그런가 이 영화는 송강호의 천재성이 만개한 것 같아.

봉 | 뒤로 가면서 사건의 흐름을 따라서 초점이 자연스레 옮겨간 것 같아. 2시간 안에 둘의 역이 바뀌는 거. 감독들이 해보고 싶은 거잖아. 송강호는 애드리브(즉흥대사)와 대본에 있는 대사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그게 탁월해.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야” 하고 외치는 건 애드리브 같지만 대본이거든. 또 누워서 김상경한테 “너 많이 변했다” 하는 건 대본 같지만 애드리브라고.

박 | 김지운 감독은 엉뚱한 얘기 하더라. 자기 같으면 마지막 2003년 장면의 신 배열을 거꾸로 했을 거라는 거야. 나이 들어 은퇴한 박두만이 집에서 밥 먹다가 옛날에 주검이 발견된 논두렁으로 가는 게 아니라, 논두렁에서 시작해 차 타고 집에 와서 끝낸다는 거지.

봉 | 더 공포스럽다. 쿨하네.

박 | 1980년대를 담으려고 되게 공을 들였더라. 특히 조용구 형사(김뢰하)가 데모 진압하면서 여대생 끌고가는 건 정말 선명했어. 난 그런 면에 더 등한했을 것 같은데. 돈도, 시간도 많이 들고 연출하기 힘들고. 편집에서 잘려나가기 쉬운 장면이잖아. 기껏 찍고 나서 편집기사가 재미없어, 그러면 잘려나가는 거거든.

봉 | 여대생 끌고가는 장면은 두 대의 카메라로 찍었어. 잘릴까봐 신중현의 노래 ‘빗속의 여인’을 넣어서 뮤직비디오처럼 연출했지. 일종의 편집 보호대책을 세운 거지.

박 | 나도 <공동경비구역 …> 때 일부러 판문점 사진 신을 넣었잖아. 국가보안법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잘리지 않게 하려고. 편집기사는 감독한테 냉정하거든. 이거 못 찍었어, 왜 이리 재미 없어, 그럴 때 감독이 우기면 되게 쪽팔리거든.

요즘 왜 그럴까?

봉 | 마케팅 팀한테는 무책임한 건진 몰라도, 나는 장르를 목표로 만든 적이 없거든. 장르는 결과다, 그러거든. <살인…>도 연쇄살인실화극이라 했지만 스릴러도, 시대역사물이기도 좀 그렇고. 농담처럼 ‘농촌스릴러’라고 했지만. <공동경비구역 …> 때는 뭐라고 이름 붙였지

박 | 명필름에서 정하길 미스터리 휴먼 블록버스터…. 왜 한국에선 이런 말들을 내세워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비주얼이나 포스터에서 그림이나 카피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건데 말로 딱 규정 내리길 좋아하는 건 한국이 유독 그래.

봉 | 우린 장르 규정 없으면 다음으로 못 넘어가는 것 같아. 마케팅도 진전되지 못하고. 제도교육의 문제 아닐까. ‘님의 침묵’ 시 배우면서 ‘님’에 밑줄 치고 ‘조국’이라고 써 넣잖아. 뭐든 카테고리화시키지 않으면 불안하고.

박 | 관객이 요구하는 거지. 관객은 그걸 알고 보고 싶어하거든. 나는 <살인 …>이 분명히 흥행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걱정하는 이들도 있지. 요즘 흥행하는 영화와 너무 다르니까. 흥행을 고려한다면 <풀 몬티> <빌리 엘리어트> 같은 영국제 노동계급 코미디가 한국에서도 잘될 것 같은데, 사람들이 그런 건 왜 안 하는지 모르겠어.

봉 | 난 이 영화 시작할 때가 <공동경비구역…> 개봉 한달 전이었고, 2년8개월 동안 이것만 준비해 왔는데 그 사이에 워낙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서…. 이 영화를 이런 시점에 개봉해야겠다고 기획했던 것도 아니고.

박 | 창업해서 돈 모으다 보니까 아이엠에프가 닥친 거지(웃음). 내가 재작년에 여러 사람한테 2년쯤 있으면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해가 될 거라 했는데 딱 맞았어. <살인…>, <지구를 지켜라> 같은 영화가 나오고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도 그렇게 좋다고 입소문이 나 있잖아. <질투는 나의 힘>도 그랬고. 걸작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게 왜 그럴까. 붕괴 직전의 단말마의 비명 같은 걸까.

봉 | 힘차게 노를 젓는데 폭포를 향해 젓는…, 상당히 우울해지는데.

박 | 충무로 사람들은 피부로 느껴요. 상황이 너무 나빠졌다는 걸. 많은 좋은 아이템들이 중단되고 파이낸싱도 안 되고. 좋다는 영화와, 나는 별로 안 봤지만 흥행되는 영화는 별개가 돼 가고. 이렇게 힘든 건 처음 겪는데, 이럴 때 최고의 걸작들이 나오니까. 말했다 욕먹었지만 차승재(<지구를 지켜라> <살인의 추억> 제작사인 싸이더스의 대표) 하나가 미치니까 한국영화가 좋아진다고(웃음).

봉 | <올드 보이>는 개봉 예정이 언제지

박 | 올해 11월인데, 송강호는 (<올드 보이> 주연인) 최민식한테 밀리기 싫다고 내년으로 미루라고 하고 있지(웃음).

사진: 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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