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제작 싸이더스)이 기록적인 흥행 행진을 벌이며 영화계 판도에 지각 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간판을 내건 <살인의 추억>은 개봉 첫 주말 서울에서 12만7천763명의 관객을 동원해 흥행 1위에 오른 데 이어 3∼4일 박스오피스 집계에서도 14만1천976명으로 정상을 유지했다. 개봉 10일간의 관객 누계는 서울 53만177명, 전국 137만3천470명. 5일에도 대부분의 주요 극장에서 만원사례를 기록해 서울 60만명, 전국 160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올해 최고 흥행작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개봉 5일 만에 전국 100만명을 돌파한 기록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영화가 볼 만하다는 관객들의 `입소문'이 빠른 속도로 퍼짐에 따라 날이 갈수록 스크린 수가 오히려 늘어나고 있어 흥행 롱런을 점쳐볼 만하다는 게 충무로의 관측이다.
지난주에 개봉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엑스맨2>의 강력한 도전을 뿌리친 것도 배급사의 자신감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23일 <매트릭스:리로디드>가 가세하지만 이때부터는 본격적인 여름 성수기가 개막되면서 전체 관객이 늘어나기 때문에 별로 손해볼 것이 없다는 계산이다.
배급사 CJ엔터테인먼트의 황기섭씨는 "극장을 좀처럼 찾지 않던 30대 관객들이 움직이고 있는데다가 점차 지방에서 호응이 높아 400만명을 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내다보고 있다.
<살인의 추억>의 흥행 성공으로 얼굴이 환해진 것은 제작이나 투자 관계자뿐이 아니다. 영화평론가들과 영화담당 기자들까지 모처럼 표정이 밝아졌다. 2000년 <공동경비구역>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평단 및 저널의 평가와 관객의 반응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최근 극장가에서는 호평을 받은 작품이 흥행에서 참패하고 혹평을 받은 작품이 성공을 구가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조폭마누라>에서 <동갑내기 과외하기>에 이르는 최근 히트작들은 비판의 표적이 된 반면 평론가들이 일제히 손가락을 치켜든 <와이키키브라더스>, <고양이를 부탁해>, <로드 무비>, <지구를 지켜라> 등은 철저하게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한국 영화사상 최고 기록을 세운 <친구>도 소재와 폭력성 등으로 논란을 빚었다. 그러다보니 관객 사이에서는 평론가들의 별점이 적은 작품을 선호하고 충무로에서도 기자들이 좋게 평가하면 제작자들이 걱정한다는 이야기마저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은 소재면에서나 잘 짜인 시나리오, 세심한 감독의 연출력, 주-조연들의 연기 등으로 평단과 저널의 최상급 찬사를 받았고 이것이 관객의 반응으로 이어지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이나 네티즌들도 주변에 권하겠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영화가에서는 <살인의 추억>의 흥행 성공으로 조폭 액션이나 섹시 코미디 등에만 관객이 치우치고 있는 편식 현상이 다소 개선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싸이더스나 명필름 등 이른바 `웰 메이드 필름'을 만들어온 프로덕션들도 투자 유치에 다소 숨통이 트일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노종윤 싸이더스 이사는 "주위 영화인으로부터 `축하한다'는 말 못지않게 `수고했다'는 덕담을 많이 들었다"면서 "<살인의 추억>이 우리나라 영화산업의 다양성과 건강성을 회복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