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더스 대표 차승재(43)가 <살인의 추억>(감독 봉준호)으로 모처럼 흥행 홈런을 날렸다. 개봉 2주 만에 전국 200만명. 싸이더스 전신인 우노필름을 합쳐 개인기록인 <무사>의 207만명을 간단히 넘어섰고 500만명 선을 넘보고 있다.
96년 <돈을 갖고 튀어라>로 처음 자막에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차승재는 <깡패수업> <비트> <모텔 선인장> <처녀들의 저녁식사> <태양은 없다> <유령> <화산고> <봄날은 간다> <무사> <결혼은 미친 짓이다> <로드 무비> 등으로 한국 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새겼다. 작품 이력만 보아도 왜 동업자나 배우들이 그를 최고의 영화제작자로 꼽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구를 지켜라>(감독 장준환)의 흥행 참패로 실의에 빠져 있다가 <살인의 추억>으로 특유의 넉넉한 웃음을 되찾은 그를 만나 제작 뒷얘기와 영화관을 들어보았다.
-주변에서 축하를 받느라 정신이 없겠다.
=모처럼 평단과 관객의 평가가 일치됐다고 흐뭇해한다. 좋은 감독과 배우를 만난 덕이다. 관객이 많이 든다고 소문이 나니 술집에서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
-쉽지 않은 소재였는데 이야기를 매끄럽게 풀어갔다는 평가가 많다.
=연쇄살인사건이라고 하면 당연히 범인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원작인 연극 「날 보러 와요」는 형사들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스토리를 칭찬한다면 그 공은 희곡을 쓴 김광림 선생님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실화를 다루다보니 신경쓰이는 일도 많았을텐데…
=부담이 많았다. 형사들에게는 아픈 상처고 유족에게는 돌이키기 싫은 악몽일 것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주변에는 알리지 않고 제작진만 모여 희생자들을 위한 천도재도 지냈다.
-이 영화로 얻은 것이 있다면?
=가장 큰 보람은 영화가 사회적으로 순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지금이라도 범인을 꼭 잡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되겠다는 공감대가 마련되지 않았는가.
-감독의 어떤 점이 신뢰를 주었는가.
=봉감독은 97년 <모텔 선인장>에서 조감독을 할 때부터 눈여겨봐왔고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하며 형 동생하며 지냈다. 세밀한 묘사가 탁월하고 집념도 대단하다. 세 편 정도 시나리오를 갖고 왔는데 드라마가 다소 약하다고 판단돼 원작이 있고 다 아는 이야기인 <살인의 추억>으로 가자고 권유했다.
-<지구를 지켜라>가 참패한 원인은 어떻게 분석하는가.
=사후담에 지나지 않지만 복기를 해보니 정신 나간 친구가 외계인을 잡겠다는 설정 자체가 뻔하다는 인상을 준 것 같다. 제목도 조금 촌스럽고. 그러나 나쁜 작품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과 장준환 감독이 <모텔 선인장>에서 함께 연출부로 일했는데 둘을 비교한다면?
=봉감독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봉감독이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르라면 장감독은 모차르트다. 봉감독이 꼼꼼히 준비하고 노력하는 반면 장감독은 타고난 천재성으로 노는 듯 일한다. 스타일의 차이지 우열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가 조폭 코미디나 에로물을 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2001년 <썸머타임>을 만들고 앞으로 이런 영화를 하면 안되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재미있는 영화, 유행을 타는 티셔츠보다는 청바지 같은 작품을 만든다는 게 모토다. 회사의 브랜드 가치로 따져보아도 반짝 흥행하는 작품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가 낫고 수익적인 측면에서도 밑질 게 없다. TV 판권료 3천만원으로 10년 동안 방송된다면 그것도 3억원 아닌가. 우리 영화는 지금도 명절 때마다 전파를 탄다.
-싸이더스는 산업화나 벤처의 물결을 앞장서서 타면서도 전통적인 방식을 고집하는 것 같다.
=시대가 변하고 시스템이 바뀐다 해도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다. 나와 함께 일하는 감독들은 모두 의기투합한 영화 동지들이다. 우리 회사에서는 모든 일을 믿고 맡긴다. 윗사람의 잔소리가 많으면 변명거리만 찾게 될 뿐 발전이 없다. 충무로처럼 이직이 심한 동네에서 우리 회사는 별종 소리를 듣는다.
-앞으로의 계획은?
=장진영과 엄정화를 내세운 <싱글즈>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고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가 다음달 크랭크인에 들어간다. 송해성 감독의 <역도산>은 펀딩이 거의 다 됐다. 김태균 감독의 <조선의 주먹>도 <살인의 추억>의 성공으로 투자가 쉬워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종현 감독의 <슈퍼스타 감사용>, 민준기 감독의 <천군> 등도 머지않아 청사진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