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자 예비역이었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중에 휴학했고, 3년 뒤에야 군제대한 남자 동기들과 함께 복학했다. 3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느 순간 돌이켜보아도 후회없을 만큼 그때는 끊임없이 일하고, 여행하고, 고민했던… 그런 시간을 보냈다. 겁도 없이 배낭하나 달랑 메고, 또 배낭만큼 무거웠던 고민을 등에 지고 호주 농장 곳곳에서 하루 일당을 차곡차곡 모으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 전공이 관광경영이었건만) 유럽 문화 유산을 보면 전공쪽에 좀더 애정이 가려나… 아니었다.
귀국하여 다시 일년을 일했다. 더이상 복학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스트레스와 함께 끝내지 못한 방학숙제를 들고 개학을 하루 앞둔 초등학생처럼 하루하루 우울하게 보내던 때쯤이다. 그 우울증을 영화보기로 풀면서 <씨네21>을 뒤적거리던 어느 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영화의 눈물겨운 제작일지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약간 술렁거리는 마음으로 나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같은 시절이 있었다.
2년여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얻은 휴우증과 함께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미래를 고민했던 1999년 무더위가 숨죽일 무렵. 밤 9시 코아아트홀에서 혼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심경으로 이 영화를 대면했던 것이다. <It’s the end>가 흘러나오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는 그저 멍하니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다가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십대 시절이 가지기 쉬울 법한 호기를 부리며 건달을 꿈꾸다 칼받이가 되어 쓰러진 상환(류승범)의 마지막 모습에서 뜻대로 되어주지 않는 인생의 수렁이 왜 그리도 절절히 느껴졌는지…. 경쾌하게 웃다가 그냥 끝나는 영화가 아니었다. ‘삶이 녹록지 않다’라는 진실을 처절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옴니버스가 다른 장르로 전개됨에도 불구하고 맥을 잃지 않고, 통통 튀는 대사와 사소한 디테일들이 살아 있는 이 영화의 캐릭터들이 우리네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는 연유다. 더불어 일전에 읽었던 눈물의 제작일지의 감흥은 이 신선한 영화에 더욱더 깊은 애정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홈페이지를 찾아가 박수치는 마음으로 네티즌 펀드에 투자하고, 인츠필름에 류승완 감독 열혈팬 모임 ‘압권’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나는 지난 3년 동안의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부터 나의 영화사랑은 더욱 각별해졌다. 영화 한편한편에 고민하고, 두근거리고, 가슴 아파하고…. 학교 시나리오 수업부터 문화센터 영화강좌를 쫓아다니는 등 영화에 대한 설렘을 거침없이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 짝사랑은 아직도 여전하다. 영화는 그저 벽에 걸려 있는 액자 속의 그림처럼 볼 수는 있되 만질 수는 없는, 그러한 막연한 동경의 대상에만 있었다. 질퍽거리는 길을 3년이나 걸어갔는데도 나를 미치게 하고 애타게 할 만한 “내가 원하는 게 뭐야”를 찾지 못한 그 길목에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만난 건 유행가 가사처럼 행운이었다.
가장 감동스럽게 본 영화 혹은 내 인생의 최고의 영화를 꼽으라면 다른 영화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나에게 주는 의미는 이 꼭지의 제목처럼 ‘내 인생의 영화’, 바로 그것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바람은 바람의 길을 가고/ 강은 강의 길을 가는데/ 나는 지금 어느 길을 가고 있는지/ 자유롭고 싶다, 이 무거운 몸 벗고/ 저 새들과 같이 저무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다 - -백창우,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