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1편의 선의마저 의심스럽게 만들어버린 <매트릭스2>
2003-06-04
글 : 김소희 (전 씨네21 편집장)
허접한 신화학

“당신이 무엇을 기대하더라도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는 이런 홍보문구와 함께 ‘재장전’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만한 이 카피는 만약에 1편인 <매트릭스>에 관한 것이라면 큰 불만없이 동의할 수도 있다.

4년 전에 나온 <매트릭스>는 영화역사의 몇몇 전통과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환경으로부터 균형 잡힌 영양분을 취하면서 고도로 스타일리시하고 오락적인 SF영화 안에 동시대의 철학적 질문을 새겨넣었다. 특히 디지털이라는 첨단 테크놀로지가 가시계(可視界)-가지계(可知界)의 이원성에 관한 고색창연한 철학적 주제와 결합하면서 사유의 지평을 재건설해보인 흥미로운 사례였다.

이런 성과는 사실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들을 정교하게 인용하고 조합한 산물로서 그 키워드는 들뢰즈, <공각기동대>(1995, 오시이 마모루), 동양 무술과 동양적 세계관, 기독교와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이었다. 그러나 인용과 오락적 포장이 어찌나 균형 잡히고 뛰어났던지 <매트릭스>는 혼성 모방의 천재적 잠재력을 입증하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오리지널’이 되었다.

그런데 <매트릭스2 리로디드>를 보고 나면 <매트릭스>에 대한 이 모든 선의가 텍스트의 모호함을 자의적으로 과잉 해석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느낌이 든다.

시오니즘 강화

<매트릭스2 리로디드>는 <매트릭스>와 외형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매우 다른 영화다. 보수적인 기독교 교리, 특히 시오니즘이 내러티브 전체를 좌우할 정도로 전면화되면서 매우 공격적인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였던 시오니즘(Zionism)은 19세기 후반부터 시온이라는 약속된 땅 즉 팔레스타인을 되찾겠다는 구체적인 정치운동으로 변모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시오니즘의 근거지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갔고, 1948년 이스라엘이 정식으로 건국된 다음에는 아랍을 적대시하면서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국제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1975년 유엔총회는 시오니즘을 “인종주의 및 인종차별주의”라고 명시한 바 있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시오니즘적 성격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지하세계 ‘시온’의 집회장면이다(인간을 대표하는 구원의 근거지에 시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영화에서 사용한 공간의 성격은 상당히 이질적인 것들이 혼재하지만 시온의 경우 <메트로폴리스>(1926, 프리츠 랑)가 제시했던 공간 컨셉들을 충실하게 계승한 위에 고딕 성당의 높은 아치와 고대 로마의 지하 예배당인 카타콤의 느낌을 끌어들여 전체적으로 병참기지 같은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모피어스가 대중을 향해 연설한다. 이 장면은 지도자의 거대한 상반신을 뒤로 걸고 아래로 군중을 내려다보는 전형적인 선동 숏을 포함하고 있다. 이후에도 모피어스는 영화 안의 인물과 영화 밖의 관객에게 이 영화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역할을 전담하는데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예언이 실현되어 전쟁이 끝날 것이며, 평생 지속해온 성전을 바로 지금 끝내야 한다”는 것으로 일관된다. 그 외에도 기독교-시오니즘을 적용하면 많은 것들이 일관성 있게 해석된다. 복제인간 스미스의 역할은 기독교에서 ‘악마’를 규정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실제로 스미스가 또 다른 스미스를 복제하는 방식은 “검은 악으로 물들인다”는 기독교의 메타포를 그대로 시각화한 것이다. 컴퓨터 용어로 치장하고 있는 몇몇 중요한 개념들, 이를테면 삭제(deletion), 원천(source), 메인 프로그램 혹은 종착점, 시스템 건축가 등의 표현을 심판과 처벌, 종말, 천국, 하나님 같은 표현으로 바꾸어 들으면 이야기가 술술 풀린다. ‘그곳’에 이르는 ‘마지막 문’의 ‘열쇠’, 그 문이 열렸을 때 쏟아져나오는 눈부신 빛 등은 모두 기독교의 고전적인 상징 개념이다.

‘시스템 건축가’가 다시 한번 종말을 예고한 다음에 도시가 재난에 휩싸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고층건물 한가운데가 불길과 함께 폭발하면서 무너져내리는 모습은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9·11 테러를 연상시킨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장면을 종말에 대한 반복된 예고 이후에 덧붙임으로써 종말론은 때아니게 집단적인 공포심을 자극한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이같은 틀에 균열을 내는 사람은 뜻밖에도 주인공 네오다. 그는 무언가 사명을 수행하도록 예정된 사람이지만 아직 그것을 확신하지 못한 채 ‘슈퍼맨 놀이’나 트리니티에 대한 사랑에 몰두하면서 말썽꾸러기 ‘디즈니 보이’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3편인 <매트릭스 레볼루션>은 이처럼 모호하고 분열된 정체성을 가진 채 자신의 사명을 유예함으로써 기독교-시오니즘에 균열을 불러오는 네오를 ‘신의 사명자’로 순화해나가는 과정을 주요한 이야기축으로 다루어 나가지 않을까 예상된다.

철학의 타락

<매트릭스2 리로디드>는 여전히 철학적 주제에 도전한다. 그중 하나가 기계문제인데, 평의회 원로 한 사람이 자못 존경받을 만한 얼굴로 “사람을 살리는 기계가 있고 죽이는 기계도 있다”고 네오에게 설파한다. 두 사람은 “기계가 없으면 난방, 환기, 전기는 어떻게 하나?”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짐짓 불가지론자의 제스처를 취하며 논쟁을 마무리한다. 기계 문명의 가장 큰 수혜자인 미국 사람다운 보수적이고 하나마나 한 이야기, 이것이 각종 철학자를 요란하게 들먹였던 워쇼스키 형제의 기계론이다.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철학적인 논란의 핵심은 매트릭스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매트릭스 안에서 인간 주체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를 해명하는 데 들뢰즈 철학의 유용성이 많이 회자되었다. 들뢰즈가 개진하는 사유의 핵심은 ‘주름’(le pli)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다. 우주는 주름 잡혀 있으며 펼쳐진 부분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요 접혀져 주름진 부분은 눈에 안 보이는 또 다른 현실이라는 들뢰즈의 생각을, 워쇼스키 형제는 디지털의 힘을 빌려 ‘매트릭스’라는 이름으로 우리 눈 앞에 펼쳐보였다(고 여겨졌다).

이와 연관되는 또 하나의 질문은 디지털 시대의 인간 정체성 문제다.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대문자 나I 대신 무수한 소문자의 나i-i-i-i-i로 분화된 정체성을 갖는다. 이것은 생물학적 인간과 복제인간 사이의 경계도 희미해지고 변형되는 결과를 낳는다. 워쇼스키 스스로 모방했다고 말하는 <공각기동대>의 경우 복제인간을 디지털 세계 속에서 전개될 인간 주체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확장해서 인식한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 안에서는 여기저기로부터 자신을 복제하면서 이 모든 것을 “나, 나, 나”(me, me, me)라고 부르는 스미스를 디지털 주체의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원리를 바탕에 깐 선악 이분법의 적용을 받는 스미스는 디지털 시대의 인간 정체성에 대해 전향적으로 사고해볼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리하여 <공각기동대>는커녕 <블레이드 러너>(1982, 리들리 스콧)가 도달했던 사유의 지점에서도 한참 미끄러져서 할리우드 특유의 악당과 영웅 놀이를 반복하는 수준으로 하강했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는 미국이 프랑스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과 반발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프랑스어식 r과 th 발음을 뒤섞어 말하는 남자는 와인과 요리, 미인, 에로스, 시, 철학에 탐닉하면서 우아한 척하지만 재수없고 오만한 인상을 풍기고,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는 그를 “거짓말쟁이에 변태 속물”이라고 흉본다. 페르세포네 역의 모니카 벨루치는 이탈리아 출신인데, 심지어 네오의 프렌치 키스가 프랑스인 남편의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한다! 이들의 집을 가득 채우고 있던 유럽풍의 무기와 조각상들이 네오의 격투로 무참하게 부서지고 무너질 때 미국인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낄까?

한편 키메이커는 영락없는 일본인의 이미지이다. 작은 키에 종종거리는 걸음걸이, 꼼꼼하며 세밀한 기계에 능숙해서 마침내 트리니티로부터 “솜씨가 좋군”(You’re handy)이라는 칭찬 한마디를 듣는다. 영화에서 보이는 이런 전반적인 태도는 현실 속 미국의 국제적 유대 관계와 정확히 겹쳐진다.

지금 관객은 ‘매트릭스’가 과연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논의를 벌이는 중이다. 인터넷에는 이에 대한 질문과 답변 주고받기가 한창인데 결론은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들이 인간을 사육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라는 식으로 기울고 있다. 가지계를 불러들여 총체적 현실을 인식하고자 했던 들뢰즈의 기획이나 디지털 시대 인간 주체의 정체성을 질문했던 <공각기동대>의 사유는 어디로 가고, 할리우드영화에서 무수히 봐왔던 선악 이분법이 되어 다시 한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정신적인 불균형과 혼란 속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나서는 것은 물량과 컴퓨터 기술에 바탕을 둔 스펙터클이다. 특히 고속도로를 지어놓고 GM 200대를 가져다가 반쯤 망가뜨려 가면서 질주하는 레이싱 장면은 게임 시대의 관객에게 어필하려는 속도감과 아슬아슬함을 눈이 아플 정도로 과시한다. 이런 부분에 관한 한 <매트릭스2 리로디드>는 세계 최고겠지만, 철학과 분리된 기술력과 물량 공세는 여느 평범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기술을 과시하고 숭배하는 일종의 테크노 페티시즘을 면치 못한다.

물론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는 쉽사리 단순화되지 않는 의미망이 펼쳐져 있다. 3편인 <매트릭스 레볼루션>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근거가 될 만한 것들도 몇 가지 보인다. 원래 성서에서 유대인을 탄압하는 바빌로니아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이 네오 일행의 전함 이름으로 사용된 것은 어떤 복선처럼 보인다. 또 디즈니 보이에서 사회적 영웅으로 변신할 것으로 예상되는 네오, 예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배반당했다고 느끼는 모피어스(그는 “내가 한 꿈을 꾸었도다. 이제 그 꿈이 사라졌다”라고 읊조린다), 손바닥을 칼로 그어 피를 내며 네오를 암살할 것처럼 보였던 정체불명의 남자, 페르세포네의 변심 같은 것들이 그 단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2 리로디드>가 허접한 신화학(junk-food mythology)을 여기저기 흩뿌려 현혹하는 가운데 시오니즘을 훈계하려는 기획이 바탕에 깔려 있는 SF로 방향을 선회해버린 마당에 <매트릭스 레볼루션>이 이 문제를 수습해나갈 길은 그리 넓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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