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파 프롬 헤븐>이 올해의 미국영화가 될 자격이 충분한 이유
2003-06-12
글 : 짐 호버먼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더글러스 서크의 50년대 멜로드라마를 대단히 지적으로 훌륭하게 혼성모방해낸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은 서크의 <바람에 쓴 편지> <슬픔은 그대 가슴에>, 그리고 무엇보다 <순정에 맺은 사랑> 등을 원재료로 투영시켜 만든 시나리오를 통해 고귀했던 50년대를 돌아본다. 그리고 랩소디풍의 라흐마니노프 스타일 화음으로 이 감정의 혼란스런 소용돌이를 극적으로 묘사하는 엘머 번스타인의 음악 역시 이 영화에 큰 힘을 실어준다.

<파 프롬 헤븐>은 1957년 금빛으로 반짝이는 가을, 코네티컷 하트포드의 고급 교외주택가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서 캐시(줄리언 무어)는 난평면 주택(1층과 2층 사이에 인접하는 중간 2층이 있는 호사스런 집 - 역자)의 안주인으로 성공적인 영업이사 남편과 두 아이들과 흑인 하녀와 2색조의 스테이션 왜건을 갖춘 채 완벽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웬 호감가는 외모의 청년- 흑인- 이 정원에 서서, 나무 한 그루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일종의 부르주아판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랄 수 있는 서크의 <순정에 맺은 사랑>은 제인 와이먼이 연기하는 40대 부유한 과부와 그녀의 젊은 정원사 록 허드슨의 로맨스에 중점을 두었다. <파 프롬 헤븐>은 여기에 나이와 계급문제를 집어넣어 좀더 복잡하게 만든다. 허드슨 역할로 레이몬드라는 흑인 홀아비(데니스 헤이스버트)를 만들고, 캐시 역시, 실은 행복을 빼앗긴 특이한 종류의 부인으로 새롭게 다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캐시의 정원에서 타인은 레이몬드뿐만 아니다. 그녀의 남편 프랭크(데니스 퀘이드) 역시 자신의 비밀스런 삶을 가지고 있다. 그는 초록조명이 깔린 칵테일 라운지, 하트포드에서 유일한 게이바를 자주 찾는다.

영화에서 추상미술에 대한 인용 흔적은 뚜렷하다.

헤인즈는 대단히 지적인 감독이지만, 무어를 전면에 앞세운 전작 <세이프>에서와 마찬가지로 배우들을 대하는 그의 습관적인 뻣뻣함은 여기서도 역시, 오히려 유리한 결과를 낳는다. <파 프롬 헤븐>은 무엇보다도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욕망이 빚어내는 지옥에 관한 영화이며, 이것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눈길로 가장 잘 표현된다(때로 헤인즈는 <순정에 맺은 사랑>에 대한 R. W. 파스빈더의 헌정작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특징적인 그 길고 비난하는 듯한 눈길을 인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슷하게, <파 프롬 헤븐>은 적잖은 양의 파토스를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풍선- 정신치료, 순응주의, 편견 등- 으로부터 끌어오는데 그것들은 불행한 커플의 머리 위로 먹구름처럼 몰려든다.

모든 것은 그저 다 기호(sign)이며, 소외란 사회적 사실주의의 한 형태일 따름이다. 서크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파 프롬 헤븐>은 의미가 미장센으로부터 파생되는 세계, 꾸밈이야말로 표현의 본질이며 파토스란 그저 매장되어버릴 그런 세계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대궐 같은 교외의 거실에 드리운 그림자는 인테리어 장식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며, 자잘한 장신구들은 무색의 공기처럼 빛난다. 자연조차도 장식을 위해 축소되거나 혹은 더 과장돼 있다. 꽃들은 마치 장례식장의 조화 같고 나무들은 벽지 같은 풍경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가을 낙엽조차도 큐 사인이 떨어져야 비로소 바람에 날리는 것 같다. 공기도 찐득찐득할 정도로 고요하다. 분위기는 초현실주의적이라기보다 차라리 극사실주의적이다. 적어도 레이몬드가 캐시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갑자기 니그로들이 도처에 등장한다- 흑인지위향상협회(NAACP) 회원 두명이 정말 캐시의 집 대문 앞에 나타난다. 서크의 세계에서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던 일들 중 하나다.

서크는 수많은 주해(註解)를 얻고 또 남들에게 주해를 다는 등 온갖 주해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서크식 텍스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헤인즈는(<록 허드슨 홈 무비>에서 마크 라파포트와 마찬가지로) 영화비평 한편을 영화로 담아내는 대단한 작업을 해낸 셈이다. 과장이나 풍자에 기대지 않고 헤인즈는(서크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수사(修辭)를 뭔가 폭로적이고 풍성하고 괴이한 어떤 것으로 변화시켰다. 서크의 작품들을 읽는 데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라면, <파 프롬 헤븐>은 더욱 놀라운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말해 이미 죽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장르를, 온전한 몸을 가진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이것은 올해의 미국영화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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