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한켠은 음악이 담당한다. 유제하의 <우울한 편지>는 살인의 전주곡이자 관객을 20년 전의 그 공간으로 데려가는 추억의 전주곡이기도 하다. 유제하의 노래는 스산한 살인의 느낌과 함께 추억의 공간에 관한 따뜻한 느낌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장치로 작동한다. 감독은 유제하의 노랫소리를 라디오나 녹음기 같은 장치를 통해서만 나오게 하고 있다. 소리도 빵빵한 스테레오 사운드보다는 모노필터를 입힌 코맹맹이 소리가 자주 선택된다. ‘과거’라는 시간대를 위한 사운드 선택이다. 약간의 공간감을 동반하여 어디선가 울리는 유제하의 우울하고 달콤한 멜로디는 그 역시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점까지를 상기시키며 살인의 추억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 추억의 한가운데에, 역시 그 멜로디처럼 우울하면서도 달콤하게 생긴 살인의 주인공이 존재한다. 그 아름다운 청년/변태 살인자가 자기 골방에 모로 누워 있다. 이 영화의 키 포인트 가운데 하나다.
스코어를 담당한 사람은 이와시로 다로. 그는 히사이시 조와 더불어 일본 영화음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대가다. 동북아시아 어린이들의 어린 시절을 사로잡았던 <플란더스의 개>(봉준호 감독의 동명 전작과는 별개. 이것도 인연?)나 <엄마찾아 삼만리>의 음악을 썼던 작곡가이다. <바람의 검심>의 스코어는 전설처럼 회자되는 작품. 또 <어나더 헤븐>을 비롯, 극영화의 스코어도 많이 썼다. 특히 <어나더 헤븐>은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인의 추억>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재패니메이션의 신화 가운데 하나인 그의 음악은 장중한 스케일과 완성도의 측면에서 영화에 힘을 더하고 있다. 영화적 보편성이랄까, 그 비슷한 것이 있다면 다로의 음악이 <살인의 추억>으로 하여금 거기로 다가가도록 만드는 하나의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심리적 분열이나 불안감을 표현하는 날카로운 소음성의 스릴러적 요소는 장중함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섬세하게 처리해야 할 대목에서 웅장한 스케일로 대충 뒤덮고 넘어가는 대목이 보이는 것은 시간이 부족했거나 작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가 한국말을 모른다는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을지 모른다. 가령 송강호라는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 시골 말단 형사의 말투는 저속하고 투박하며 스스럼없는, 특유의 어감이 살아 있는 말투다. 다로가 과연 그것을 붙들어냈을까? 내 생각에는 ‘아니오’다. 만일 그랬다면, 그는 스케일 이외의 섬세하고 토속적인 어떤 것을 음악적으로 구상해내야 했을 텐데,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것들만 봐도 영화음악은 역시 텍스트적이다. 음악적인 텍스트뿐 아니라 배우의 말투까지도 참고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은 지엽적인 것이다. 이 영화는 그만큼 스케일과 섬세함을 두루 지닌 수작이다. 시골 들판을 내려다보는 큰 시선의 카메라가 바깥에 있다면 수사관들의 동선을 깊이 있게 따라다니며 이곳저곳을 헤집는 집요한 시선의 카메라가 경찰서 내부에 있다. 그 시선들 사이 어디엔가 ‘살인’이 있고 ‘추억’이 있다. 살인과 추억의 공간을 기묘하게 공존시키는 그와 같은 상반된 ‘눈’들을 통해 봉준호 감독은 범죄영화의 독특한 스타일리스트로 떠오르고 있다.성기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