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핀 꽃 한 송이
영화도 영화지만 <장화, 홍련>은 이례적으로 관객 반응에서도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내러티브도 수습 못한 시청각적 깜짝쇼라는 비판과 무섭고도 아름다운 한국공포의 신경지라는 찬사 사이에는 제목처럼 쉼표가 꾹 찍힐 정도다. 상반된 평가가 대체로 남녀에 따라 갈리자 한 인터뷰에서 김지운 감독에 대해 논리적이고 거시적인 남성성과 감각적이고 미시적인 여성성을 대비시켜 후자의 손을 들어준다. 뒤틀린 서사를 꼬집더라도 심리적 디테일에 주목해야 영화의 이해도를 높일 거란 뜻이겠다. 그럼 그렇게 이해된 마음의 세부가 영화의 성취도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반문할 수도 있지 않을까? 비주얼에 감탄하고 스토리에 실망하는 손쉬운 감상을 피하면서도, 아귀 안 맞는 소녀의 무의식이 영화적으로 파들어간 깊이를 가늠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양분된 반응의 근거는 그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영화가 꼬인 건 문제의 반전이 공포를 해소하기보다 단선적 편집을 비틀며 새로운 퍼즐 게임을 펼친 탓인데, 이때부터 관객은 미세한 순간의 심리적 파장에 공감하느냐 마느냐를 떠나 트라우마 찾기의 정신분석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르면 수미는 자기 때문에 수연이 죽었다는 죄책감을 동생의 환영에 투사하고, 계모 은주로부터 수연을 과잉보호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부한다. 그러나 수연을 괴롭히는 은주의 히스테리와 그렇게 당하고 있는 수연을 다그치는 수미의 히스테리는 묘하게 닮아 있으며, 정작 보호자인 수미는 은주가 수연을 괴롭힌 뒤에야 나타나곤 한다. 이는 수연이 죽던 순간 현장에 있지 못했던 최초의 사건을 반복 상연하는 것이지만, 더불어 그것이 미필적 고의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깐다.
정신분석 퍼즐 게임의 부작용
은주가 일종의 해리성 장애에서 비롯된 수미의 인격적 분신이라는 점은 그녀들간의 유사성에 대한 혐의를 증폭시킨다. 표면적으로 은주는 엄마와 동생의 죽음을 야기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동시에 수미가 수연의 친엄마처럼 굴 수 있도록 고전적 악역을 맡아주는, 그래서 역시 수미의 부채감을 덜어주는 적대적 조력자이다. 그러나 수연에 대한 투사와 달리 은주로 둔갑한 수미의 가면 밑에는 훨씬 더 복잡한 표정이 숨어 있다. 아버지 속옷을 서로 챙기는, 삼면경에 비치는 은주-수미의 모습은 은주가 엄마를 대신해 아버지를 차지할 뿐 아니라 수미를 대신해 아버지를 차지하는 욕망의 매개자이자 경쟁자임을 일러준다. 어머니에 대한 원초적 지향을 품은 가운데 어머니를 제거하고 아버지를 욕망하는 여아의 오이디푸스(엘렉트라 콤플렉스)는 수미의 심적 단계를 요약해준다. 이때 매개자로서의 은주는 수미가 욕망하는 자아-이상이며 경쟁자로서의 은주는 그런 욕망을 제어하는 초자아의 모습을 띤다.
은주가 아끼던 새를 죽여 수연의 침대에 던져놓은 사건은 수미의 무의식이 어여쁜 외모와 달리 매우 심오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원전 <장화홍련전>에서 껍질 벗긴 쥐가 낙태의 산물이고 방종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징벌의 계략이었던 점을 참조하면, 초경을 치른 수연에게 그 계략을 적용한 수미는 그렇게도 아끼던 수연이 생식력을 지닌 어엿한 여자로서, 즉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로서 등장할 가능성을 파투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수연과 생리일이 같은 은주에 대한 간접적 처단이자(냉장고의 고깃덩이로 자신을 놀라게 한 은주도 죽은 새를 보고 놀란다), 수연이 빼닮은 친엄마에 대한 소급적 적의까지 내포한다(귀신이 되어 죄의식을 각인시키는 친엄마도 경쟁자였다?). 또 한 마리의 죽은 새를 아버지의 몫으로 남긴 건 “아빠가 불러모은 이 모든 더러운 일”에 대해, 그 더러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원죄와 도착이 투사된 “책임져!”라는 항변이겠다. 아버지는 그리 놀라지도 않고 <조용한 가족>에서보다 더 조용히 시체를 매장하고 상처를 덮어둘 뿐이지만.
수연을 죽여 자루에 담은 뒤 몽둥이찜질하는 은주가 수연의 인형을 같은 식으로 난자하는 수미의 가공된 더블이란 점은 수미가 엄마-계모의 야누스 놀이를 하는 ‘두 얼굴의 아가씨’임을 폭로한다. 그 두 얼굴이 바라보는 하나의 자리는 아버지의 옆자리겠지만, 거기엔 이런 금지된 욕망에 대한 자기검열과 무력한 가부장을 대체하는 안주인에의 권력의지도 엿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수미의 죄의식으로 돌아오자면, 죽은 새와 인형을 통해 수연을 부정하는 몸짓은 결국 “평생 유령처럼 붙어 다니는” 수연의 기억을 지우려는 엑소시즘의 일환이다. 수연을 되살려내어 트라우마를 억압하려는 시도가 동시에 트라우마를 끝없이 환기시키는 빌미였던 것이다. 은주에게 “날 도워줘”라고 말하며 죽여달라 종용할 때, 마침내 분열된 수미-은주는 죽음으로 한몸이 되려 한다. 살아 있는 한 욕망과 상처의 순환은 가면놀이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유희는 상처를 감추면서 감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욕망이 위장된 채 노출되는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재확인시킨다. 단순한 자책감과 분리 불가능한 수미의 불법적 욕망도 이로부터 유추된다.
그러나 근친상간까지 추정케 할 이 모든 ‘꿈의 해석’은 수미네 마룻바닥처럼 삐걱대는 디제시스(diegesis)의 불확정성에 눈감을 때 가능하다. 아버지가 은주와 통화했을 가능성과 은주(수미)에게 약을 주거나 잠자리를 피하는 점, 외출하니 문 잠그라는 점 등은 은주가 애당초 부재함을 암시하지만, 한자리에서 대화하거나 식사 때 호들갑 떠는 은주가 수미였다는 확증은 없기에 실재의 은주와 수미인 은주는 구별 불능에 가깝다. 게다가 분산된 시점과 반전 이후 점점 짧아지는 숏은 보여주기만 하다가 갑자기 말하기 시작하는 불규칙한 리듬을 타며, 때로 모자라고 때로 넘치는 정보는 너무 성기거나 너무 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결과 비밀을 감추면서 드러내는 수미의 무의식은 스스로의 힘으로 관객을 흡수하기보다 감독의 의식에 의해 조작되어 관객을 몰아붙이는 듯하다.
10대 여성의 감수성을 수려하게 입체화
고로 <장화, 홍련>의 정신분석적 진실은 엔딩에서야 나타나는 최초의 순간을 최선의 의도로 되짚어 추출한 결론이지, 영화 자체의 화법과 공들인 스타일의 산물은 아니다. 그 최초의 사건마저, <메모리즈>에서 역추적한 앙상한 기원처럼, 엄마의 원한까지 파고드는 파토스의 충격 대신 우연찮게 엇나간 사실적 상황을 알려줄 뿐이다. 물론 감독은 수미가 은주와 신경전을 벌이느라 수연을 구하지 못한 그 ‘돌이킬 수 없는’ 사소함이 얼마나 집요한 악몽으로 남는지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동기적 경험으로 수미의 개별적 육체를 찌르는 찰나적 ‘푼크툼’(punctum)일지언정 관객의 푼크툼이 되긴 어렵지 않을까? 오히려 로르샤하 심리테스트 같은 대칭 꽃무늬 벽지, 수직 부감으로 찍힌 연못가의 소녀들, 앙각으로 잡힌 거대한 목조 가옥 등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관객을 관통할 이미지들일 텐데,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푼크툼의 보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물들의 내면은, 관객이 동기화될 만한 여건, 영화적 맥락에서 접근 가능한 소통 코드로서의 ‘스투디엄’(studium)이 부실하면 심리적 푼크툼을 촉발시키기 힘들다. 그 심리적 푼크툼을 <장화, 홍련>은 자꾸 일본 공포영화식의 서프라이즈 파티로 유발하려든다. 그때 영화의 오감과 영혼은 분리된다.
아무래도 여성 심리에의 밀착을 요구하는 <장화, 홍련>은 여성 관객에게 더 많은 푼크툼을 선사하는 듯하지만, 스투디움은 영화 내적 상징과 외적 알레고리를 구축하는 기반이기도 하다. 이 점은 <장화, 홍련>이 <디 아더스>에서 참고해야 했을 (반전 테크닉보다 더) 중요한 요소다. 거기서 빛과 함께 타자의 상징이던 유령은 햇빛 알레르기가 허구임이 폭로되듯 실은 적대적 타자가 아니다. 배타적 주체를 상징하는 저택은 비가시계(타자)가 가시계(주체)와 공존하는 토대라는 타자의 철학을 알레고리로 삼는다. 어머니가 자식들의 살해자라는 진실은 공포의 근원이 타자에 대한 주체의 맹목이었음을 깨우쳐준다. 한국 공포의 한 경지인 <소름>도 전범이 될 만하다. 어머니의 원한을 상징하는 아파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얼룩진 가족사를 소환하는 동시에, 여성의 모성과 남성의 광기가 폭력으로 결탁한 변두리 계층의 가족체제와 우리 시대의 ‘페니스 파시즘’을 섬뜩하게 알레고리화한다. 귀신없이 사진 한장으로도 이런 공포의 형이상학이 가능한 것은 하우스호러의 공간을 심층적으로 조직한 의미적 스투디움 때문이다.
<장화, 홍련>은 방마다 때깔을 달리하고 소품 하나에도 정성을 다했지만, 그것들이 자리할 상징과 알레고리의 터전은 협소하다. <조용한 가족>에서 그나마 산장을 외부와 이어주던 TV는 저 혼자 지직거릴 뿐이다. 이 웅장한 폐쇄공간은 싱크대나 옷장 같은 (귀신이 거주하는) 자궁 이미지의 확장이자 무능한 가부장을 둘러싼 ‘여인천하’일 순 있겠지만, 그것들이 수렴되는 슬픈 기억의 심리학이 하우스호러의 새로운 의미망으로 도약하진 못한다. 감독은 일본식 외양과 서양식 내부가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기억을 함의한다고도 하는데, 가장 칭찬받는 스타일을 청산 대상으로 삼는 건 설득력도 부족하다. ‘귀신들린 집’은 영화 내적 외적으로, 그 자체로 공포에 대해 새롭게 성찰하기보다 고혹적인 분위기에서 한번씩 강타하는 놀람의 배경으로 안주한다. <디 아더스>를 베껴댄 <다크니스>가 어둠을 비명으로만 채워넣듯, <소름>만큼 정신적 소름을 주진 못하는 <장화, 홍련>은 골동품 같은 집에 들인 돈을 흥행으로 회수하는 데 그칠 듯하다.
물론 <다크니스> 따위와 견주기엔 <장화, 홍련>의 성취들이 매우 안타깝다. 10대 여성의 감수성을 수려하게 입체화한 공로는 전형을 찾기 힘들 정도다. <장화홍련전>이 내포한 계모의 악덕을 수미의 사이코드라마로, 송사 해결을 정신분석으로, 환생 설화를 기억의 회귀로 전복한 점도 의도였든 아니든 고전의 재해석에 값한다. 그래서 오히려 <장화, 홍련>은 수연의 죽음처럼, 수미의 비극처럼, 한국적 하우스호러의 ‘못다 핀 꽃 한 송이’로 느껴진다. 그 꽃이 공포의 형이하학을 넘어서지 못한 건 영화의 정신이 없어서라기보다 그것이 영화의 육체와 온전히 결혼하지 못해서이다. 그리고 이 실패한 결혼이 감독의 실험이었다면, 다음 결혼은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주:푼크툼 & 스투디엄 -롤랑 바르트가 사진을 비평할 때 썼던 용어. 푼크툼은 점 혹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 발생한 상처를 뜻하는데, 화살처럼 꽂혀오는 강렬함, 우연성에 바탕을 둔 사진 자체의 이미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한다. 반면 스투디엄은 분석과 판단을 가능케 하는 요소들의 집합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