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비치 보이스였대도 서핑하러 가자는 노래만 불렀을 것 같았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물방울 튀는 수영장 그림을 그린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장마가 시작된 서울에서 12시간, LA의 쨍쨍한 태양과 건조한 공기 아래 물살을 가르고 시원한 액션을 선보인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와 그 출연진들을 만났다.
올랜도 블룸 “성년식 치른 기분”
<마우스 헌트> <멕시칸>의 감독 고어 버빈스키와 <더 록> <나쁜 녀석들>의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 그리고 <가위손> <길버트 그레이프>의 배우 조니 뎁이 뭉친 1억2500만달러짜리 블록버스터 <캐리비안의 해적…>은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영화였다. 브룩하이머는 “조니가 출연한다는 사실은 이 영화를 지금까지의 디즈니 영화와 구별짓는 역할을 할 것”이라면서, 지금까지의 디즈니 영화와 차별점을 두었다. 실제로 <캐리비안의 해적…>은 디즈니 이름 아래 개봉하는 영화로는 최초로 13세 관람가 등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외신이 전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출연진이 탄탄하다. <샤인>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제프리 러시가 악당 바르보사 역을 맡아 조니 뎁과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다. 또한 <반지의 제왕>에서 레골라스의 은빛에 가까운 금발머리와 활을 벗은 올랜도 블룸의 앞으로의 연기 행방을 추측할 수 있는 기회. 올랜도 블룸은 이 영화를 통해 “성년식을 치른 기분”이라고. <슈팅 라이크 베컴>에서 열혈 축구소녀 쥴스를 연기한 키라 나이틀리는 극중 역할인 엘리자베스를 “해적 그루피(추종자)”라고 소개하면서, 상당부분의 액션을 직접 소화한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해적선 ’블랙 펄’의 선장인 해적 잭 스패로(조니 뎁)는 자신의 배를 바르보사(제프리 러쉬)에게 강탈당하고 배를 찾아 떠돌아다닌다. 그렇게 십여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날, 바르보사는 ’블랙 펄’호를 타고 영국 함대가 주둔한 진지를 습격, 총독의 딸 엘리자베스 스완(키라 나이틀리)을 납치한다. 엘리자베스의 어릴 적 친구이자 그녀를 좋아하는 윌 터너(올란도 블룸)는 잭 스패로와 함께 영국 함대의 배를 훔쳐 엘리자베스와 블랙 펄 호를 찾아 나서는데, 엘리자베스의 약혼자인 노링턴 제독(잭 다벤포트) 역시 엘리자베스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잭 스패로와 바르보사, 그리고 블랙 펄 호를 둘러싼 저주가 그 실체를 서서히 드러낸다.
시대극답게 등장인물들의 의상에 세심한 신경을 기울였으며, 해적선이 유령선으로 변하는 달 밝은 밤장면의 특수효과가 인상적이다.
‘해적스럽지 않은’ 해적선장의 매력
정작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액션보다 돋보이는 점은, 해적들이 뒤쫒는 대상이 보물이 아닌 저주를 푸는 데 있다는 것, 그리고 해적선장을 연기한 조니 뎁의 캐릭터가 우리가 알던 해적 캐릭터와 다르다는 것이다. 조니 뎁이 등장하는 첫 장면, 그는 다 가라앉은 배의 돛 꼭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항구로 들어온다. 걷는 폼도, 몸짓도 말투도, 어느 것 하나 ’해적스러운’ 데라고는 없다. 보물이 있는 곳을 아는가 했더니 숨겨놓은 럼주를 마시고 늘씬하게 취해 뻗어버리고, 여자와 단둘이 남아 로맨스가 펼쳐지나 했더니 잠만 잔다. 피터팬이 네버랜드에서 그대로 나이를 먹은 것처럼, 말썽쟁이 소년 같은 매력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보여주는 조니 뎁의 슬랩스틱 연기는 다시 보기 힘든 명장면. 어쨌건 극중 인물들이 ‘최악의 해적’이라고 부르는 잭 스패로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배 블랙 펄을 되찾는 것이고, 그 블랙 펄을 강탈한 해적 바르보사 일행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걸린 저주를 푸는 것이다. 그래서 해적들은 보물을 마지막 한점까지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아야’만 한다.
시대극답게 등장인물들의 의상에 세심한 신경을 기울였으며, 해적선이 유령선으로 변하는 달 밝은 밤장면의 특수효과가 인상적이다. 해골들이 바다 아래를 떼지어 몰려가는 모습은 진혼곡이 따로 필요없을 정도의 을씨년스러움을 자아낸다. 고어 버빈스키 감독은 모험담과 액션, 로맨스, 그리고 코미디를 고르게 영화에 버무려넣었다.
시사회가 끝나고 배우들의 이름이 차례로 스크린에 나타났다. 조니 뎁과 제프리 러시의 이름에 박수를 보내던 관객(기자시사와 동시에 관객 반응을 모니터하기 위한 일반시사가 함께 진행되었다)이 올랜도 블룸의 이름에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조니 뎁이 올랜도 블룸에게 넘겨주어야 했던 것이 아리따운 소녀와의 로맨스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싶었지만, 동시에 우리가 알아온 조니 뎁의 컬트 히어로적인 모습을 곧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니 뎁 인터뷰“스패로 캐릭터 설정 위해 많이 싸웠다”
어두운 피부색과 수염, 그리고 해골무늬 반지를 낀 긴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입담배를 마는 조니 뎁(40)은 마치 강령(降靈) 의식을 앞둔 인디언처럼 보는 사람을 말없이 빨아들였다. 그러나 반항아적인, 도발적인 그의 이미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럽게도,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두눈은 다소 수줍은 듯 좀처럼 취재진을 향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라 대답하며 영화를 잘 봤다는 말에도, 마지막 인사말로도 정중하게 “감사합니다”라고 대꾸하는 성의를 잊지 않았다.
잭 스패로 캐릭터 설정을 직접 했다고 들었다. 어디서 영감을 얻었나.
주로 록밴드 ‘롤링 스톤즈’의 키이스 리처드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만화의 스컹크 캐릭터에서도. 스컹크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그런 캐릭터였다. 파티에서 맨 마지막에 떠나는 캐릭터랄까. 끝없이 마티니잔을 기울이며 비틀대는. 키이스 리처드를 모방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다만 그가 사는 방식에서 아름답기까지 한 자신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아하고, 재치있고, 현명한.
올란도 블룸이 당신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그와 일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나.
나는 요즘의 신작영화들을 많이 보지 않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잘 모르는데, 올란도를 만나 잘 알게 되면서 뭔가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배우로서의 열망이 강한 동시에 스타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에게 내가 거쳤던 싸움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어렸을 때 해적이 되고 싶었나. 그랬다면 어렸을 때 꿈꿨던 해적의 모습이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에서 연기한 해적의 모습과 비슷한가. 잭 스패로는 일반적인 해적과 다른 모습인데.
내가 어렸을 때, 나는 해적에 매료되었었다. 바다에서 머리는 바람에 나부끼고, 모험과 로맨스, 그리고 보물이 있는 로맨틱한 이미지에. 하지만 배우로서 내가 해적영화를 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잭 스패로 선장이 내가 어렸을 때 봐온 해적이냐고? 그렇지 않다. 5∼6살 때, 나는 <검은 수염의 유령>라는 제목의 디즈니 레코드 앨범을 가지고 있었는데, 영화를 본 적은 없었지만 늘 레코드를 통해 피터 유스티노프의 연기를 들었다. 어찌나 많이 들었는지, 레코드의 대사를 모두 외울 정도였다. 그의 이미지가 바로 ‘위대한 해적’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였다.
아이가 둘 있는데, 그 아이들이 이 역할을 맡는 데 영향을 끼쳤는지.
물론. 나의 다른 영화들,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 같은 영화는 15년이나 20년은 지나야 볼 수 있을 테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으니까. 하지만 캐릭터와 관련해서는, 물론 재미있기를 원했다. 아이들이 좋아할 수 있고 함께 웃을 수 있는. 하지만 동시에 막스 브러더스의 막내였던 하포 막스 같은 캐릭터를 원했다. 그는 어린아이들부터 지적인 성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지층을 가지고 있었다.
블록버스터로서는 처음인데, 이전 영화들과 작업과정에서의 차이점은 없었나.
내용이나 캐릭터 측면에서 보면 차이는 없다. 다른 점이라면, 이 정도 규모의 프로젝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기 때문에, 캐릭터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좀더 열심히 싸워야 한다는 것 정도. 사실, 처음 그들은 내가 영화를 망치지나 않을지 꽤 걱정을 했다. 나는 무언가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결국은 모두가 행복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영화에서와 달리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는데.
아… 꼭 지푸라기 같지? 스티븐 킹 원작을 영화화한 <시크릿 윈도, 시크릿 가든>이라는 다음 작품을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