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착하게만 나와서 아쉬워요”, <스캔들>의 조현재
2003-07-16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눈이 맑은 사람을 만나는 건, 순정만화가 그리는 것처럼 누군가 전학올 때마다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닳고 단 만화책 책장만큼이나 세상엔 먼지가 많은 탓이다. 그런데 성큼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선 조현재는 살짝 피하는 눈길 끝에서도 청량한 기운을 던지는, 꿈속의 전학생처럼 보였다. 고등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뭔가 다른게 없을까” 일찍 험한 일에 뛰어들었다는 청년. 스무살 무렵에 이미 돈버는 일의 쓰라림을 체득했고, 그리 쉬워 보이진 않는 연예계에 스스로 발을 디뎠던 조현재는, TV가 만들어준 깨끗한 이미지를 고스란히 되비추고 있었다. 권력 싸움의 한가운데에서 혼자 벽을 보며 노여움을 쏟아내고 순진하고도 당당하게 저잣거리를 활보하던 <대망>의 세자가, 미움도 사랑도 안으로 삼키면서 잘 다린 신부복 옷깃처럼 구김없는 마음을 잃지 않던 <러브레터>의 안드레아가, 갈색머리 주황색 티셔츠의 낯선 차림으로 스튜디오에 서 있었다.

조금 긴장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앉은 조현재는 “사진 많이 안 찍어봤다고요? 왜요, 일부러 그랬어요?”라는 사진기자의 한마디에도 십초쯤 기다렸다가 신중한 대답을 내밀었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고요….” 말을 흐리는 틈을 참지 못하고 조급하게 쏟아내는 질문, 분명한 답을 채근하는 말투와 부딪칠 때도, 그는 여전히 자기 속도를 잃지 않았다. “<대망>은 사극이라서 걱정을 많이 했지만…혁이 형(장혁)과 지내는 게 재미있었어요.” “연기할 때는 내 캐릭터말고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조현재라는 이름보다 내가 연기한 캐릭터로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수가 되고 싶어했다가 “찬찬히 생각해보니 연기하는 모습이 내게 더 맞을 것 같아서” 배우로 방향을 틀었다는 조현재는 보기 드물게 이미지와 실재가 일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첫인상은 어디까지나 첫인상일 뿐이었다. 스스로 ‘퓨전 사극’이라고 표현하는 영화 <스캔들>에 이르러 조현재는 갑자기 고집이 세졌다. <스캔들>은 <위험한 관계> <발몽> 등의 원작이 된 소설을 조선시대 배경으로 각색한 작품. 조현재는 대가 센 두 남녀, 배용준과 이미숙 사이의 게임에 휘말려 첫사랑을 희생당하는 순진한 명문가 청년으로 출연했다. “<위험한 관계>에선 내 캐릭터가 복수를 하는데, 이번엔 그런 게 없어요. 너무 착하게만 나와서 아쉬워요. 칼싸움도 해보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거울을 보면 사납게 보이기도 하는” 자신의 얼굴을 티없도록 깎아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조현재는 서두르지 않는다. 촬영 며칠 전에야 대본을 받아들고 찍은 <카이스트>가 너무 창피해 1년 동안 쉬면서 연기공부를 했다는 그는 “조금씩 올라와 여기까지 왔다는 게 너무 고맙다”. 그가 가진 이미지는 순수와 함께 세상을 일찍 품어버린 성숙이기도 했으니, 예상을 뒤엎는 반응은 아니었지만, 다음 순간 표정은 20대 중반 철없고 천진한 젊은이의 그것으로 돌아갔다. “혼자 어떻게 연기공부 하냐고요? 비밀이에요. 진짜예요.” 오래 기다린 끝에 드물게 얻어낸 웃음. 그 웃음은 한번 보기 위해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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