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세월이 흐를수록 연기는 아름다워, 줄리언 무어
2001-05-16
글 : 위정훈

스티븐 스필버그는 <도망자>를 보고 있었다. 한순간 해리슨 포드의 동료의사로 분한 여배우가 눈에 들어왔다. 3분. 그녀가 등장했던 시간은 단 3분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스필버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쥬라기 공원2>(1997)에 출연할 생각이 있냐고. 이번에는 3분이 아니라 120분 내내. 제프 골드블럼의 상대역인 여주인공 사라 하딩 역이었다. 오디션? 필요없었다.

군법무관인 아버지를 따라 23개 도시를 떠돌아다니던 어린 시절, 줄리언 무어는 내성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소녀였다. “왜, 학교 다닐 때 왕따당하는, ‘엽기적인’ 애들 어디에나 있잖아요. 땅꼬마에 안경끼고 운동은 젬병인 애. 그게 나였어요.” 유년기와 사춘기를 오로지 책과 함께 보냈던 ‘엽기소녀’는 어느 날 연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보스턴대학 드라마스쿨을 졸업한 뒤 80년대에는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무대에 섰고, TV드라마 <아일 테이크 맨해튼>(1987) 등 TV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영화와의 첫 만남은 초라했다. 무명배우들이 흔히 거치는, 지나가는 행인 혹은 살인마의 희생자. <어둠 속의 외침>(1990)에서 미라의 희생자가 첫 배역이었다.

<숏컷>의 로버트 알트먼, <위대한 레보스키>의 코언 형제, <피카소>(Surviving Picasso, 1996)의 제임스 아이보리, <세이프>의 토드 헤인즈, <사이코>의 구스 반 산트, <부기 나이트>와 <매그놀리아>의 폴 토머스 앤더슨. <애수>의 닐 조던, 그리고 <한니발>의 리들리 스콧. 주류와 인디, 장르도 개성도 각각인 이들은 모두 줄리언 무어를 선택했다. 사실 90년대 중반까지 줄리언 무어는 수잔 서랜든을 닮은 배우, 눈크고 광대뼈 튀어나온 강단있는 여인에 어울리는 배우였다. 하지만 <어쌔신> <쥬라기 공원2> 등 주류영화에 출연하던 줄리언 무어는 오히려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머리를 말아올리고 눈을 절반만 내리깔아도 오만하고 열정적인 여류 화가가 되고, 눈물이 고인 눈과 여린 어깨만으로도 비탄에 잠긴 여인의 실루엣을 만들어내는 줄리언 무어는, 이제 ‘개성적인 조연’을 넘어 자신만의 영토를 개척한 것이다.

<한니발> 제작팀이 줄리언 무어를 캐스팅하자 토머스 해리스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에 메모를 보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한니발>은 렉터 박사 중심이고 <양들의 침묵>에 비해 클라리스의 비중이 작다. 게다가 클라리스는 FBI에서 해고당하고 조사위원회에 서는 등 외부 갈등에 고심하지만 내면의 혼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건 줄리언 무어가 아니라 각본의 문제다. <한니발>의 클라리스는 스테레오타입화된 ‘여형사’다. 하지만 줄리언 무어는 그 와중에도 렉터와의 교감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그건 줄리언 무어 덕분이다. <한니발>을 마친 뒤에도 그녀는 더욱 넓게, 깊게 행보를 재촉하고 있다. 7월에는 데이비드 듀코브니와 함께 출연한 SF코미디 <에볼루션>으로 한국 관객과 다시 조우한다. <빌리 엘리어트>의 감독 스티븐 달드리의 신작 <시간들>(The Hours)에서 니콜 키드먼, 에드 해리스, 메릴 스트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편, 남편이기도 한 바트 프로인트리히 감독의 <월드 트래블러>(World Traveler)에도 출연한다. 독립영화와 할리우드, 장르와 배역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이제 불혹을 넘어선 줄리언 무어는 외모에 상관없이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워지는 몇 안 되는 배우 중 하나다.

사진 SYG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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