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정보가 드러나는 글임을 밝힙니다.)
올 여름 ‘할리우드 인베이젼’은 속편한 속편들의 융단폭격이라 할 만하다. 여기엔 <매트릭스2>같이 이야기가 선조적으로 이어지는 일리아드형도 있고 <미녀 삼총사2>같이 에피소드를 병렬적으로 바꿔가는 오디세이형도 있는데, 특이하게 <터미네이터3>(이하 <T3>)는 둘 다에 속한다. 새로운 터미네이터가 왔다 사라지지만 상황은 발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장점이면 좋으련만, 속편의 단서가 될 모든 ‘꼼수’를 용광로에 내던진 전편을 떠올리면 <T3>은 속편을 만들라는 팬들의 성화를 상업적으로 승화하기 위해 억지 설정으로 전편을 우려먹는 듯도 하다. 슈워제네거 형님의 12년치 주름살이 여전히 빵빵한 알통으로 가려진다 한들, 은퇴한 가수의 은퇴 번복 컴백쇼가 그렇듯 예전의 아우라보다 이를 재현하려는 부담감이 더 커 보이는 것이다. 그 부담에 따른 의욕 과잉은 적절한 포인트를 못 찾고 종종 규모와 파워의 과시로 치닫는다. 볼거리는 많지만 경이로움은 적고,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엄지손가락을 쳐드는(또는 쳐들게 하는) 장렬함 따위는 없다.
그래서 <매트릭스2>처럼 <T3>도 대중적 평가에서는 의견이 분분할 듯하다. 한데 워쇼스키 형제는 제임스 카메론보다 더 영향력이 막강한지, 조너선 모스토의 <T3>를 ‘<매트릭스> 이후의’ <터미네이터>로 보이게 만든다. 뜨겁지만 뻔한 감동 대신 암담하지만 쿨한 비전을 ‘리로디드’한 <T3>는 종점을 알 순 없어도 최근의 현실적, 영화적 맥락에 맞춰 방향을 튼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전편들이 매번 당대의 징후이자 영화적 개척자일 수 있었던 맥락을 되짚게 한다. 1, 2편이 뚫은 영화사적 의미와 3편에 드리운 패러다임 변화는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에 대응한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요한다. 가장 상업적인 영화들이 역으로 심오하듯, <터미네이터>들에는 ‘무엇을 보든 그 이상을 떠들게 하는’ 힘이 있다.
테크-누아르의 시간여행
원조 <터미네이터>가 태어난 80년대는 비디오 보급으로 영화 수용자가 증대하고 메이저/인디, 주류/컬트의 경계가 무너지던 때였다. 이는 영화의 현실반영성보다 상호텍스트성을 부추기면서, 무수한 B급이 A급을 흉내내며 뒤트는 포스트모던한 조짐을 낳게 된다. 70년대 작가 장르영화가 쇠한 뒤 장르 해체와 퓨전이 대세가 된 흐름도 같은 맥락이다. B급 제작자 로저 코먼 밑에서 <죠스> 아류의 속편 따위를 만들던 카메론이 사이보그와 타임워핑을 냉전시대 특유의 핵전쟁 시나리오에 녹여냈을 때, 그는 가장 80년대적인 영감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싸구려 독립영화 <T1>은 SF 묵시록의 전쟁영화이자, 시간여행과 웨스턴식 대결을 곁들인 도시 액션영화이며, 무엇보다 암울한 이미지들 속에 기계인간이 고감도 서스펜스의 탐정놀이를 벌이는 테크놀로지 누아르인 것이다. 이런 혼종성은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나아갈 바를 밝혀주게 된다.
SF 누아르와 여전사 이미지의 전범은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에이리언>일 텐데, 카메론은 인간과 사이보그의 화해를 희망적으로 <에이리언2>와 <T2>에 담아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T2>는 경찰 터미네이터가 나옴에도, 도주보다 인류 구원의 전초전에 무게를 두어 누아르 분위기를 털어낸다. 3편은 결말 빼고 2편의 스토리라인을 거의 답습한다. 묘하게도 목표물의 규모 확대(기업→국방성 네트워크)와 반비례로 영화의 무게는 점점 줄어든다. 과묵한 슈워제네거는 2편에서 조크를 익히더니 3편에선 “…be back!”을 남발하며 오버한다. 슈워제네거가 옷을 약탈하는 술집은 영화의 정체성을 암시하던 ‘Tech-Noir’에서 마초 냄새나는 ‘The Corral’(가축우리)로 바뀌고, 3편의 컨셉인 성적 유희 가득한 ‘Ladies’ night’로 가벼워진다. 모스토는 누아르를 코미디로 대체한 셈이다.
<T1>의 또 다른 퇴색 아이템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인 시간여행이다. 부하이자 어머니의 보디가드가 아버지가 된다는 난센스는 타임머신의 필연적 모순이겠지만, 2편에서 존 코너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오묘한 소망을 피력하다가도 “생각하면 복잡하다”고 덮어버린다. 과거가 미래 속에 있고 터미네이터가 직선적 시간체계에서 회귀하는 게 아닐 수 있다는 전복적 가능성은 복잡성을 배제하는 오락영화의 문법 뒤로 사라진다. 결과, 터미네이터는 항상 2029년에서 오며 현재는 고정된 미래의 묵시록과 대결해야만 한다. 3편은 그 대결의 무력함을 보여주면서 선택받은 메시아의 운명론은 강화한다. 핵은 터지게 되어있고, 존과 케이트가 키스했던 과거와 T-800이 존을 죽이리란 미래는 양쪽에서 현재를 결박한다. 이때 영화의 모든 서스펜스는 역으로 멕거핀이 돼버린다. 어차피 종말은 오고 메시아는 살아남는데, 죽도록 고생하는 것이다. 이는 안 그래도 부족한 긴장감을 허무하게 해소해버리지만, 감독은 4편의 포석을 위해 무리하게 자충수를 둔다.
신체 변형과 테크놀로지의 숭고
숱한 사이보그들 중 터미네이터가 돋보이는 데에는 세련된 비주얼도 결정적 역할을 한다. 복합 장르 <T1>을 하나의 새로운 장르처럼 주조한 건 슈워제네거의 단단한 근육과 그 속의 차가운 철골이 빚어낸 ‘메탈릭 블루’의 금속성 이미지이다. 내부 골조가 드러난 터미네이터가 시뻘건 토키눈으로 쇳소리를 내며 집요하게 돌진해올 때의 서늘한 전율은 호러의 그것에 육박한다. 속편들의 가장 큰 관심사도 기계의 육체가 선사할 공포 섞인 미지의 경이였다. 이는 인간이 자연에서 느꼈던 어떤 통제 불능의 ‘숭고’(sublimity)를 인간이 창안한 테크놀로지에서 맛보게 된 현대적 인간조건과도 맞닿는다. 특히 영화는 초기부터 기계문명의 수혜자이자 관찰자로서 끈질기게 인공적 숭고의 압도적 거대함과 무한함을 재현해왔다. 그 선상에서, 슈워제네거는 프랑켄슈타인적 크기와 기계적 무자비함의 육체적 결합을 완벽하게 시각화한다.
일련의 터미네이터들은 바로 이 테크놀로지-숭고가 시대적 징후를 내포한다는 암시도 준다. 1편은 인간의 피부 내부의 기계를 사실적으로 해부해 보인 반면(2편의 슈워제네거는 해부학 지식을 과시하기도 한다), 2편의 액체금속로봇은 칩이나 회로의 존재를 완전 무시한, 아무리 사이보그라도 불가능할 것 같은 신체변형을 전시한다. 총 맞아 뚫린 구멍으로 보이는 피부 이면은 매끈한 은빛의 유체금속 이미지뿐이다. T-800(모델명 101)은 근대 초기 신체 메커니즘을 드러낸 해부학의 경이감을 소환하지만, T-1000은 인간과 유사 구조를 띤 사이보그의 아날로그 패러다임을 순식간에 넘어선다. 전자가 표면과 다른 이면을 밝힐 수 있다는 모던한 야심을 부추긴다면, 후자는 표면에서 표면으로 변할 뿐인 파악 불능의 포스트모던 이미지를 방사한다. <T2>가 전편을 넘어선 속편이 된 데에는 인간적으로 유추 불가능한 미래적 이미지의 새로운 숭고 덕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84년과 91년 사이 특수효과 기술이 얼마나 디지털해졌는지를 입증해준다. 2편은 아날로그 기계의 손을 들어주며 테크놀로지를 비판하지만, 실상 디지털 변형체(기계란 말이 어색하다)에 훨씬 공을 들인 테크놀로지의 개가인 셈이다. 이 딜레마는 할리우드의 모순이자 영화의 태생적 모순과도 닿아 있다.
3편의 T-X는 다소 컨셉이 잘못 설정된 느낌이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T-1000에 비해 변신놀이는 자제하지만, 슈워제네거와의 육박전은 여자치고 너무 둔중해서 T-1000의 업그레이드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기계들을 원격 조종하는 기능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부각시킨 3편의 테마와도 어울린다. 터미네이터는 고체에서 액체를 거쳐, 비가시적으로 편재하기 시작한 셈이다. 문제는 새로운 능력이 이미지로 가시화하지 않기에 경이감은 적다는 점이다. <매트릭스2>의 스미스처럼 신체복사를 보여준 T-1000의 선구적 복제술은 테크놀로지의 숭고가 그만큼 신체와 밀접함을 일러준다. 신체는 무엇보다 이미지이며, 이미지는 본래 의미에 앞서기 때문이다. 인간적 의미로 포섭되지 않는 그 이미지에서 공포와 매혹의 숭고가 발산된다. 테크놀로지는 미지의 숭고를 발견하는 동시에 숭고를 익숙한 것으로 정복해간다. T-X는 X라는 낯선 기표와 달리 아무래도 익숙한 공포, 김빠진 매혹에 그치는 듯하다.
매트릭스 속의 휴머니즘
그럼 <T3>만의 승부수는 뭘까. 카메론의 역량에 못 미친 모스토는 스스로 영화사적 의의를 개척하는 대신 <매트릭스> 패러다임에 어정쩡하게 무임승차하는 것처럼 보인다. 존이 자살하려들자 신체 메커니즘상 자살 못하리라 장담하는 T-800은 매트릭스 내의 인과론적 인식론을 흉내내며, 스카이넷 진입에 ‘키’가 필요하고 ‘빨간 봉투’의 ‘암호’를 통해 ‘시스템 코어’로 접근한다는 점은 매트릭스 ‘소스’ 진입과도 유사하다. 1, 2편과 달리, 그 과정이 새로운 깨달음의 관문들이라는 게임 구조도 <매트릭스>적이다. 모든 기계들이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잠재적인 적이며 그것이 결국 파국을 낳는다는 설정은, 원본이나 중심없는 소프트웨어이자 인류를 공격하는 바이러스이며 현실공간을 지배하는 비가시적 프로그램인 스카이넷을 매트릭스의 자매품으로 보이게 한다. 존 혹은 네오는 어떻게 인류를 구할 건가. 그의 주위엔 운명적인 연인과 든든한 수호천사, 그리고 집요한 악당이 있다.
물론 <T3>은 <매트릭스>만큼 주도면밀한 세계관과 이미지를 보여주진 못한다. 2편에서 폭파된 사이버다인사에서 빠져나온 스카이넷이 국방성을 좌지우지한다는 전제는 넷시대를 감안할 때 그저 기계와 인간이 싸운다는 SF 설정보다 현실적이지만, 전편에 비해 영화적 박진감을 주진 못한다. 그러나 바로 그 현실성은 전편들과 <T3>을 갈라놓는다. 1편이 기계/인간의 대립, 2편이 비인간적 기계/인간적 기계의 대립에서 늘 후자의 승리를 휴머니즘 넘치게 보여준 데 반해, 3편은 이 도식을 빌리는 척하면서 2편이 막아냈던 ‘심판의 날’을 고스란히 불러들인다. 핵전쟁은 인간이 창조했지만 인간을 심판하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발발하며, 이를 막을 수 있는 시스템 코어 따위는 없다. 중앙집중식 서버 개념이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근대적 기계 체제를 함의한다면, 3편의 결말은 그 인간 중심적 근대문명에 대한 탈근대적 기계문명의 한방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저 목숨을 건질 뿐인 방공호에서 손 맞잡는 존과 케이트의 나약함과 대조적으로, 바깥에선 거대한 버섯구름이 숭고하게 뭉실거린다. 멋진 액션도 없는 얼핏 찝찝한 엔딩이지만, 상투적 휴머니즘을 뿌리친 참신함은 가상한 면이 있다.
무력한 국방성이나 낡고 텅 빈 대통령 방공호는 근대적 국가체제의 종언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미 2편에서 스카이넷은 러시아에 핵미사일을 발사할 것이라 언급되는데, 단지 미국 내의 적들을 위협하기 위함이다. 냉전 이후 러시아는 적도 아니며, 오직 인간 대 기계의 전선만 있으리란 예상은 3편에서 현실화한다. 4편이 나온다면 이젠 지도자가 된 존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국가주의와 휴머니즘의 망령이 부활할 조짐을 보인다. 2편의 핵전쟁 시나리오는 역으로 미국을 인류의 대표로 상정해놓는데, 미국 SF가 으레 그렇긴 해도 여기 일침을 가하는 듯했던 3편에서 미래의 존 코너 뒤에 전에 없던 성조기가 펄럭거리는 것이다(게다가 존은 독립기념일에 죽는다고 한다). 들라크르와의 삼색기 드날리는 ‘자유의 여신’을 묵시록적으로 패러디한 듯한 이 구차한 애국심은 달 표면에 성조기를 꽂는 것만큼 황당하다. “인류의 미래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선언은 결국 종교적 외피를 뒤집어쓴 모종의 정치적 음모론을 노골화한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선 인류의 적을 키워냈음에도 종말론을 선포하고 구원자를 자처하는 메시아-미국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듯.
자본-기술 복합체의 블록버스터
아쉽게도 이런 이데올로기는 80년대식이라서 비판하기도 멋쩍지만,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같은 테러에 신경증 걸린 부시 시대 미국을 엿볼 순 있겠다. 게다가 세편 모두 미국적 보수가 정점을 치던 때 개봉한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냉전과 걸프전, 이라크전 즈음의 군산복합체 국가에 대한 디스토피아 비전과 이에 대한 자기검열을 양가적으로, 매우 억눌러가며 취한 듯하다. 이런 억압은 특히 3편의 여성성에 대한 통제로도 나타난다. 사라 코너의 강한 페미니즘 이미지는 존이 아니라 케이트가 T-800의 명령권자라는 설정이 보여주듯 여성성 부각을 대세로 만들었지만, 케이트는 사라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한다. 광고와 달리 별로 막강하지 않은 T-X 역시 가슴 확대와 송곳 손가락, 피맛을 보는 뱀파이어 이미지를 클리셰처럼 활용할 뿐 남성을 능가하는 숭고는 보여주지 못한다. 대신 조금이라도 야할라치면 커트되는 적정 수준의 성적 암시만 늘었는데, 아마도 10대를 위한 배려로 보인다.
결국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뭐니뭐니해도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 따위는 필요없는 상업영화로 자족한다. 카메론은 할리우드의 제작비 상승과 세계시장 제패를 주도했는데, 그 상한선 없는 자본주의적 욕망은 미국 중심적 보편 문법을 표 안 나게 뿌려넣은 화려한 테크놀로지와 한쌍을 이룬다. 고로 군산복합체에 대한 표면적인 비판은 자본-기술복합체의 자가증식을 위한 콘텐츠쯤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한데 영화판의 매트릭스를 짜버린 <매트릭스> 이후 더이상 고루한 패러다임의 문명비판은 점점 먹혀들기 어려워지는 실정이다. <T3>는 이런 상황 변화에 카메론 아닌 감독이 이리저리 양다리 걸치며 대처한 결과물이다. 그 분투는 블록버스터도 이제 포스트모던한 장치들을 자연스럽게 심어놓는 성과를 거두지만, 시리즈물의 관점에서 전편을 능가한 속편의 대열에 이르진 못한다. 그래도 향수를 느낄 수 있다면 정체성에 대한 인간적 갈등까지 겪는 성숙한 T-800 덕일 텐데, 아쉽게도 이 매력적인 터미네이터를 연기한 슈워제네거에게 성숙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온몸으로 <터미네이터>의 역사였던 그의 육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한 챕터를 넘기고 노병처럼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그가 돌아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