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은 천개의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네 생살을 찢게 될 거야. 몇몇 사람들이 그래서 피를 흘리고, 너 자신도 별수 없이 피를 흘리게 될 거야. …그리고 그 모래 폭풍이 그쳤을 때, 어떻게 자기가 무사히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너는 잘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아니, 정말 모래 폭풍이 사라져버렸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지.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 폭풍을 빠져나온 너는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네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그래, 그것이 바로 모래 폭풍의 의미인 거야.… ” -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중에서
한때 그도 모래 폭풍 속에 있었다. TV를 틀면 온통 ‘유지태표’ 웃음으로 무장한 광고들이 소비자를 향해 아귀처럼 달려들었고, 많은 청춘영화의 시나리오들은 그의 눈길을 기다렸다. 그의 허무한 대답들은 여기저기 과장되어 해석되었고, 그의 엉뚱한 몸짓들은 대중의 기대 속에 박제되었다. 모든 곳에 유지태는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유지태는 없었다. 대중이라는, 인기라는 폭풍들은 한동안 날카롭게 그의 생살을 찢어댔고, 98년에 데뷔한 이 어린배우는 <바이 준>을 시작으로 <주유소 습격사건> <가위> <리베라 메> <동감>, 인터넷영화 <봄날은 간다> <내츄럴시티>까지 조금 과해 보이는 수의 필모그래피를 그의 이름 아래 올렸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없는 스케줄 속에 온몸을 맡긴, 그러나 모두들 ‘봄날’이라고 부르는 그 시간들이 갈 무렵, 그는 폭풍의 끝자락을 보았다. 물론 정말 모래 폭풍이 사라져버렸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당신들의 눈앞에 서 있는 유지태는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봄날은 간다>를 끝내고 홍보차 들른 일본에 그는 그냥 눌러앉아버렸다. 차기작으로 결정한 <내츄럴시티>의 제작이 약간의 혼란을 겪던 시절, 데뷔 5년 만에 찾아온 첫 휴식이었다. “처음엔 지하철 타는 게 너무 좋았어요.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그런데 조금 지나니까 사람들 몸이 부딪혀오는 게 싫어지더라고, 인간이 참 간사해.” 그때부터 온전히 두 바퀴의 자전거에 의지해 도쿄의 작고 많은 골목들을 누비며 다큐멘터리가 상영되는 극장으로, 같은 듯 다른 사람들의 눈들과 마주칠 수 있는 공간들로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의 여유가 찾아들 무렵,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온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거울 속으로>의 김성호 감독이었다. “한국에 있었을 때 이미 한번 읽었던 시나리오였는데 감독이 건축을 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참 잘 짜여진 시나리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흔쾌히 출연을 결심을 한 그는 5개월 만에 다시 한국으로 가는 짐을 꾸렸다.
과거의 그가 세상 다산 영감 같았다면 지금의 그는 중년의 사내 같다. “회춘하셨네요”라고 하니, 멋쩍은 듯이 허허 웃는다. 아마도 최민식과 나이 차가 별로 안 나는 역할로 등장하는 <올드보이> 촬영이 한창이기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저한테 벅찬 영화죠.” 그에게 <올드보이>는 어떤 면에서 큰 도전이었다. 40대 초반의 나이도 그렇거니와 여지없이 꽉 짜여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속으로 몸을 던지기에는 그에게는 너무 많은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했던 꽉 짜여진 영화들… 다 실패했잖아요. 그런데 박 감독님은 믿고 싶었어요.” 이 영화에서 최민식을 15년 동안 감금하는 이우진 역으로 출연하는 그는, <올드보이>를 “뭐라 설명하기 힘든 그러나 재밌는 영화”라고 살짝 귀띔한다. “최민식 선배님 같은 훌륭한 배우와 연기하게 된 건 영광이고 기분 좋죠. 그런데 쉽게 이야기하는, 선배님의 연기를 보면서 배우고 있어요, 식은 아닌 것 같아요. 물론 작품에 임하는 자세 같은 건 많이 배우죠. 하지만 남의 연기를 보면서 연기를 배울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건 내 연기가 아니죠.”
올해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한 연출작 <자전거소년>으로 ‘유감독’이 된 그는 ‘유지태 감독 데뷔’ 같은 세간의 호들갑스러운 시선에는 크게 괘념치 않는 눈치다. “사람들에게 보여진 첫 작품이라서 그렇지, 학교 다닐 때 작품 많이 찍었는 걸요.” 하지만 시골아이들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처럼 찍어내려갔던 이 영화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좋은 기억이었음은 분명하다. 요즘도 그는 틈만 나면 어떤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까란 생각 속에 빠져 있다. 최근 그의 머릿속을 유영하는 것은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라는 제목의 영화다. “눈이 안 보이는 침술사 이야긴데요. 그냥 모두 눈을 똑바로 뜨고 살지만 실제로 모두 장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혹시 운명을 믿으세요?” 사진을 찍던 유지태가 뜬금없이 묻는다. “운명이란 거 있는 것 같죠? …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버리는 거예요. 운명지워진 어떤 것이 있는 거야. 내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것들.” 그리고 엉뚱하게도 병아리들과 함께 살아가는 오리새끼 이야기를 한참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닭 속에 크던 오리들이 있었어요. 어미가 모이를 주는데 오리들은 발버둥치면서 빨리 가려 해도 늘 병아리들보다 느린 거예요. 너무 배가 고프니까 둘이 힘을 합쳐 가보기도 하고, 온갖 수단을 써도 안 되더라 이거예요. 그런데 하루는 물에 떠 있는 모이를 먹으려고 물속에 들어갔는데 병아리들은 따라갈 수도 없는 속도로 그 오리새끼들은 헤엄칠 수 있었데요. 갈퀴가 있으니까. … 내가 닭인지 오리인지 모르겠어.”
갑자기, 이영애에게 어릴 적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아버지가 사귀는 사람 있으면 데려오래”라고 엉뚱한 결말을 짓던 <봄날은 간다>의 상우가 떠오른다. “글쎄, 하지만 내가 뭔지를 알기 위해 막 일을 해야겠다는 강박은 없어요. 원하는 영화가 있으면 영화 찍고, 아니면 여행하고, 혹시 써주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감독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던 걸요.” (웃음)
얼마 전 그가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출연을 결정했다고 들었을 때 이 사람의 갑작스런 속내가 궁금해진 한편, 이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본인 스스로 “치졸한 영화”라고 말하는 ‘부천으로 성애의 여행을 떠나는 남자’가 될 유지태의 모습은 사실, 상상만으로도 깬다. 하지만 홍상수라는 과학자의 현미경에 비칠 유지태의 모습이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나한테 하나도 없는 것을 보여줘야 해요. 좀 힘들 것도 같지만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으니까 편하기도 하고, 뭐니뭐니해도 너무너무 재밌을 것 같지 않으세요?” 휘몰아치는 모래 폭풍을 넘어 운명이라는 배에 사뿐히 올라탄 유지태. 어디에도 없을 것 같던 남자, 그 남자는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