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한 편에 한 장면만 기억하는 병, <이웃집 토토로>
2003-08-06

광고를 만드는 15초 인생이라 그런 것일까? 전체보다는 부분에 잘 흥분하는 소인배라 그런 것일까? 어쨌든 나는 영화의 전체보다는 한컷, 한 장면에 마음을 빼앗긴다. 2∼3시간짜리 영화를 보더라도 기억나는 건 오직 한두신뿐이다. 마치 첫사랑과의 긴 사랑을 기억하기보다는 그녀를 보낼 때의 한 장면만을 기억하는 것처럼, 나를 사로잡은 한두 장면이 가슴속에 남아 떠나질 않는다.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아마 대학을 떨어진 직후였을 것이다) TV에서 본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에서 여자주인공은 통굽으로 된 단화를 신고 있었다. 나는 그것만으로 그녀가 좋았다. 그녀는 그녀의 통굽 스타일처럼 사랑을 쟁취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는데, 나는 그런 태도마저도 좋았다. 그것은 순전히 통굽으로 된 높은 단화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그녀는 지금까지 나의 마음속 연인으로 남아 있다.

<생활의 발견>에서 남아 있는 장면은 여관방에 들어간 남자주인공이 여자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는 순간이다. 영화의 줄거리가 어땠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데, 그 장면만큼은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좋아했던 영화를 돌아보니, 나는 감독의 이름을 한번도 기억한 적이 없다. 심지어 주인공의 실제 이름이나, 극중 이름도 다음날이면 내 기억 속을 떠나버린다. 아, 이런 걸 직업병이라고 하는 것일까?

한 장면만을 기억하는 병, 그것말고도 나에겐는 또 하나의 영화병이 있다. 나의 경험을 영화 속에서 확인하는 병이다. 어린 시절 그리고 자라면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영화 속에서 찾게 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시골로 이사한 첫날, 이사한 집을 보는 자매가 신발을 신은 채로 무릎으로 기어들어가는 장면이나 막내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은 나를 전율시킨다. 잊혀졌던 기억의 장면이 현실로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그곳에 등장하는 먼지귀신. 먼지귀신은 나의 체험은 아니지만 무릎으로 기어들어가는 장면과 연결되어 나의 마음을 열게 한다. 그래서 하룻밤 만에 나무를 키우는 장면조차도 마치 나의 경험처럼 생생해진다.

정류장에서 자매가 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 동생이 졸고 있는 장면은 아직도 찡하게 남아 있다. 그것도 나의 경험 탓일 것이다. 초등학교 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동생이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었다. 차마 깨울 수 없어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 시간을 참았던 기억이 난다. 어깨와 팔에 쥐가 나는데도….

동생은 잘 모르겠지만 동생에 대한 여러 가지 기억들이 아련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골 아지매 집에 놀러갈 때, 따라가겠다고 울면서 버스 안까지 올라온 동생을 매몰차게 내리게 한 일은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버스를 쳐다보면서 울던 동생의 눈망울이 내내 잊혀지지 않는다. 역시,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아지매 집에서 소를 몰고 언덕에 누워 있다가, 동생에게 계속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산에 피어 있던 코스모스를 따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 있던 꽃은 이미 다 시들어버린 상태였다. 엊그제 일을 다 잊고 동네 아이들과 열심히 놀고 있던 동생. 하지만 아직도 버스에서 보았던 동생의 그 눈망울은 아직도 나에게 빚이 되어 남아 있다.

나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를 좋아한다. 물론 이런 장르의 영화를 부부가 같이 보다보면 부작용이 따를 때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저 영화 실화네”, “저게 실화야?”라고 말을 하면, 아내는 늘 나를 무시하는 눈초리를 보낸다. 그리고 분위기 깨지 말라…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가 실제인지가 늘 궁금하다. 물론 부질없고 영화감상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궁금한 걸 어떡하란 말인가? 그래서 아내에게 말한다. “이 사람아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도 실화니까 더 감동적인 거야!”(핸디캠으로 촬영한 것이 감동적이었나?)

어쨌든 난 영화가 좋다. 내 경험이 있어서 좋다. 사실이 있어서 좋다. 비록 한두 장면만 가슴에 담고 살지라도….

정용기/ 여백커뮤니케이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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