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괴담>이 나왔을 때, 세 가지 의미에서 ‘썰렁’했다. 첫째, 당시 거의 맥이 끊긴 한국 공포영화의 부활이라는 장르면에서, 둘째, 영화의 괴기스러운 교육현실이 허구가 아닌 진실이라는 주제면에서, 셋째, 공포의 장치가 다소 미흡하다는 기술면에서. 그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이하 <여고괴담2>)뿐 아니라 수편의 공포영화가 붐을 이루듯 만들어졌다. 후속작들은 기술적 측면의 썰렁함은 개선하였으나, 주제면의 을씨년스러움을 담지 못하는 예가 빈번했다. 일련의 “할리우드 짝퉁 난자(亂刺)영화”들 말이다. 조금 거품이 빠지고 ‘진실을 말하는 한기’를 간직한 영화, <소름> <폰> <장화, 홍련> 등이 나왔다. 너무도 독창적이라 전혀 계보를 달리하는 <소름>을 제외하고, <폰>과 <장화, 홍련>은 <여고괴담> 시리즈와 닮은 구석이 있다. ‘소녀귀신 이야기’이지 않은가?
내 식대로 말하자면, <여고괴담>과 <폰>은 학교와 가정이라는 제도의 폭력성과 허구성을 폭로한 “뼈대공포”영화로, <여고괴담2>와 <장화, 홍련>은 ‘소녀 섹슈얼리티’의 금기와 긴장을 건드린 “속살공포”영화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분노와 적개심이 명쾌하게 발산되며, 후자는 죄의식과 성욕이 은밀하게 함입된다. 보는 이 역시 전자에 의해서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공포에 쉽게 동화되는 반면, 후자에 의해서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공포에 분열을 겪는다. 전자가 코드화되어 있는 내러티브로 의식에 호소하는 반면, 후자는 코드화되지 않는 영상으로 무의식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장화, 홍련>은 마지막에 추려지는 줄거리가 무섭다기보다는 다리 사이로 피 흘리는 귀신, 극도로 긴장된 염정아의 팔목, 하얗게 질린 수연의 눈, 그리고 화사한 꽃무늬 벽지 등의 잔영이 일종의 환유로 작용하며, 오래도록 보는 이의, 특히 소녀들의 민감한 성감(대)를 건드리는 영화이다. <여고괴담2>의 지나치게 밝아 아득하게 느껴지는 한낮의 옥상,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두 소녀의 과잉된 감정과 소심한 선생의 ‘모호한’ 표정 등이 그리 작용한다.
너는 내가 아직도 꿈많은 소녀로 보이니?
어찌됐든 이들 ‘소녀괴담’은 그 자체로 전복성을 지닌다. 그녀들의 결코 쉽지 않은 내면이 조망되며, 아울러 그녀들을 억눌러온 단단한 제도와 부드러운 관습의 억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아직도 꿈 많은 소녀로 보이니?”라고 처연하게 묻고 있는 이들 영화들은 그래서 참 무섭다. 어여쁜 소녀들에게 투사해온 우리의 안온한 꿈에 쩍! 금이 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이하 <여고괴담3>)은 안 무섭다. ‘더 많은 공포의 장치를!’을 표방했다는 이 영화가 무섭지 않다니 어찌된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딱하게도 ‘소녀괴담’의 공포가 어디에서 오는지 오해했다. 아이들은 <소공녀>의 무대에서 예상 가능한 규칙대로 놀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떤 진실의 폭로도, 은밀한 욕망을 드러내며 금기에 다가가는 전복성도 없다. 단지 꽉 막힌 우리 안에서 한정된 재원을 놓고 자기들끼리 질투하고 미워하는 그저그런 ‘시시한 계집애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그 계집애들이 깊이있게 이해되기는커녕 턱없이 오해되고 있으니, 이 영화야말로 지극히 ‘체제 순응적’이라, 억울한 소녀귀신들의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싶다.
<여고괴담>에서도 1등과 2등의 이야기는 나온다. 그 둘은 선생들이 ‘내부의 적’ 운운하며 필요 이상으로 경쟁을 조장한 결과 친구 사이가 깨지고 갈등을 겪는다(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사실 그냥 다같이 공부 열심히 하여 시험 쳐서 대학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1등을 하는 아이의 파편화되고 냉소적인 내면과 2등을 하는 아이의 음울한 심정을 우리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고괴담3>의 경쟁은 부추겨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예고에서 단 한명을 선발하는 예선에서 경쟁은 필연이다. 그런데 1등을 하는 그녀는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좋은 집안 출신이고, 2등과 뚱녀를 사랑하는 천진한 마음까지 지녔다. 그녀는 경쟁과 갈등을 초월해 있는 존재이다. 그녀는 이미 ‘공주’이기에 대다수의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자아가 강한 소수에게 불가항력의 시기의 대상일 뿐, 그녀의 내면을 공감하고 이해할 어떠한 통로도 이미 봉쇄되어 있다.
그녀는 ‘이 영화 안에서’ 신격화됨으로써 고독하고, 그래서 친구를 몹시 필요로 하는 존재로 그리고자 하였지만, 사실은 ‘이 영화에 의해서’ 이해될 수 없는 대상으로 소외되어, 친구를 가질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살리에리 심리’라고 들 하는 천재를 시기하는 ‘인간적인 감정’은 지극히 자기함몰적인 망상이다. 자칭 ‘살리에리’들은 타자의 재능을 신격화함으로써 열등감에서 도망친다. 그들은 자괴감을 변명하고, 자신의 열패감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를(‘천재’로 격상시키는 듯하지만, 실상은) ‘단지 천부적 재능을 지닌 운 좋은 놈’으로 격하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련한 ‘살리에리’로, 상대를 오만한 ‘모차르트’로 규정하며 상대와 자신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내던지고, 자신의 저열함을 면죄받고자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얄팍한 방어기제는 될지언정 깊은 인간이해는 결코 되지 못한다. 천재는 천재로 소외받고, 둔재는 둔재로 소외받으며, 재능의 저열함(혹은 열등감의 자기암시)이 인간성의 저열함을 낳는 자가당착의 악순환을 이룬다. 왜 ‘모차르트’의 후천적 훌륭한 점과 그의 ‘인간으로서의’ 진실한 내면을 보고자 하지 않는가?
영화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경쟁구도와 선천적으로 서열매겨진 고착화된 사회적, 자연적 위계를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갈등구조로부터 동떨어져 있으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단지 선망할 수밖에 없는 ‘공주’를 평면적으로 그림으로써 기존의 질서는 ‘어쩔 수 없는 것’, ‘감히 도전하려들다간 벌받는 것’으로 만들고 만다.
<소공녀>의 가려진 주인공 ‘베키’
계급적, 인종적, 성차적으로 극악무도한 ‘세계명작’ <소공녀>(A little princess)에는 공주에서 하녀로 전락한, 그러나 여전히 공주의 풍모를 잃지 않는 ‘세라’가 나온다. ‘세라’가 공주였을 때 ‘은혜’를 입은 ‘베키’는 그녀의 전락 이후에도 여전히 세라를 ‘공주’로 추앙한다. ‘세라’를 시기하는 ‘레비니어’가 행패를 부리든 말든 그녀는 ‘세라’의 충직한 하녀이다. ‘세라’도 ‘레비니어’도 아닌 ‘베키’에 주목한 적이 있는가? 이 영화가 미덕을 지녔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하위 주체인 ‘베키’에게 카메라를 비추며 ‘광기’를 부여했다는 점과 그 하위성의 본질이 ‘비만’에 있다는 지극히 탈현대적인 문제의식을 꼽을 수 있다. 물론 그녀의 내면을 들려주고, ‘비만 소외’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카메라는 게걸스럽게 처먹어대는 뚱녀를 엽기적인 시선으로 잡는다. 그녀는 둔하고 어눌하고 기괴하다. 그녀가 “어떻게 나를 그 더러운 애랑 혼동하니?”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공주귀신이 더러운 몸에 임할 리 없으므로, 그것은 자기혐오에 치를 떨며 공주귀신을 뒤집어쓴 뚱녀라는 확증이 선다. 그녀의 자기부정은 귀신보다 더 무섭다. ‘영화 속에서’ 그녀의 살찐 몸과 그로 인한 자폐적 습성은 그녀를 소외의 수렁으로 밀어넣는다. 그런데 잠깐, 뚱녀의 소외는 단지 ‘영화 속에서’ 일어난 것인가? 그녀는 ‘영화에 의해서’ 가장 추악하고 저열한 존재로, 따라서 ‘왕따당해 싼!’ 존재로 그려져 있다. 관음적인 남성의 시각에 의해 고통받는 여성을 찍는다면서, 카메라 역시, 아니 카메라야말로, 지극히 관음적으로 그녀의 몸을 훑는 예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이 영화는 비만으로 인한 소외를 다루면서 기실은 살찐 그녀를 카메라로 학대하고 있다.
만약, “전국비만인협의회”라는 단체가 있다면 이 영화는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들이 마치 코미디처럼 들리는가?(비만인은 우리가 마음껏 비웃어도 될 만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우리가 계급문제를 넘어 좀더 미시적인 억압과 소외의 고리로 성차와 인종의 문제를 논의하고, 나아가 장애인과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문제를 논하는 것은 이와 같은 ‘가소로움을 진지하게 대면케 하는 싸움의 역사’를 지닌다. 비만인들은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단지 몸의 기능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눈총 때문에 고통받는다. 물론 장애인들은 미학적으로 소외되긴 하지만, 도덕적으로 책망받지는 않는다(예전엔 장애인도 죄인 취급했었다). “장애는 자기 탓이 아니지만, 뚱보는 자기 탓이다. 왜 자기관리를 못하는가?” 맞는 말이다. 그런데 동성애자들도 오랫동안 ‘성욕이 과도한 탓이거나, 잘못된 탓’으로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왔다. 겨우 변태는 면했지만, 여전히 ‘비정상’으로 경원시되며, 일종의 병으로 동정받기도 한다. 비만인은 그들의 과도한 식욕이 정신을 장악하고 있으며, 그들의 박약한 의지는 이를 이겨내지 못한다고 비난받는다. 그런데 모두 어떤 건강하고 날씬한 ‘이상신체’를 욕망하는 것이 옳으며, 그 욕망을 향해 다른 욕망을 억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절대미학’이자, ‘절대윤리’는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강림하셨는가? 비만이 위험인자를 넘어 ‘그 자체가 병’이라고 말하는 논법에는 무엇이 숨어 있는가?(위험요인으로서의 흡연이나 과로는, 그 자체 병인 ‘니코틴 중독’이나 ‘일 중독’과 맥락이 다르다) 영화는 소외의 요인으로 비만의 문제를 꺼냈으면서도 그것을 선정적으로 소비하고 만다. <길버트 그레이프> <너티 프로페서>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등에서 교훈적일 만치 비만인의 내면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는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내 <여고괴담>을 돌려줘~
영화는 전작의 미덕인 전복성을 계승하지 못한 채 ‘소녀괴담’을 개인문제로 협애화하면서, 그 개인문제조차 내면으로 다가서지 못했다. 경쟁은 운명이 되고, 애정은 월담까지 하였건만 <여고괴담2>처럼 농밀하지 않다. 욕심을 냈다는 공포의 장치마저, 피 쏟아지는 장면에서는 <캐리>가, 유리조각에선 <피아니스트>가, 귀신 넘어올 때는 <링>이, 뚱녀의 인형들에서는 <여우령>이, 그리고 전체적으로 드라마 <학교II>가 자동 연상된다. 곳곳에 외삽한 비명소리는 코미디 공개방송의 웃음소리 같이 흉물스럽다. 게다가 클라이맥스격인 뚱녀의 살인장면과 다리 사이 귀신장면은 너무 일찍 나와 뒤가 늘어진다.
앗,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내 <여고괴담>을 돌려줘∼.”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