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뉴욕한국영화제]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2003-09-02
글 : 양지현 (뉴욕 통신원)
제3회 뉴욕한국영화제 정전사태 불구 진행 순조, <오아시스> <동갑내기 과외하기> 큰 인기

제3회 뉴욕한국영화제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8월14일. 삼성전자와 영화제를 공동 주최하는 코리안필름포럼(KoFFo)은 이날 저녁에 개최될 오프닝 파티의 막바지 준비로 분주했다. 이날 파티에는 삼성전자와 뉴욕 한국문화원, 코리아 소사이어티 등 스폰서 대표들이 참석하는 것은 물론, <매트릭스2 리로디드>에 출연한 배우 랜덜 덕 김과 소프라노 신영옥씨 등 한국계 유명인들과 영화배급사 관계자, 평론가, 기자, 영화학도 등 200여명이 올 예정이어서 KoFFo 멤버들도 행사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컸다.

8월15일부터 24일까지 18편 상영

유학생과 재미동포로 구성된 KoFFo는 삼성전자와 공동 주관으로 ‘뉴욕한국영화제 2003’(Secret Wonderland: New York Korean Film Festival 2003)을 8월15일부터 21일까지 맨해튼 쿼드시네마에서, 22일부터 24일까지 브루클린의 BAM 로즈시네마에서 총 18편의 작품을 소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오후 4시쯤 파티 장소가 정전이 됐다. 곧 멤버들은 이 정전이 파티 장소만이 아니라 뉴욕 전역에서 일어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다. 70년대 이후 최대 규모로 평가된 이날 정전은 뉴욕을 비롯해 디트로이트와 클리블랜드, 캐나다의 오타와와 토론토까지 수많은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9·11 이후 신경이 날카로워진 뉴요커들은 이날 정전사태가 테러일 것을 우려하기도 했으나, 곧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져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단시간에 해결될 줄 알았던 정전사태는 장기화될 것이 확연해졌고, 당연히 오프닝 파티는 취소됐다. 자정이 될 때까지 뉴욕에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고, 15일 오후 2시30분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던 뉴욕한국영화제 2003가 제대로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다행히도 영화제가 열린 쿼드시네마 주변 지역에는 15일 오후 3시경부터 전기가 들어왔고, 첫 상영작인 <해적, 디스코왕 되다>를 제외한 모든 작품이 스케줄에 맞게 상영됐다. 하지만 뉴욕 전체가 다시 정상적인 가동을 시작한 것은 일요일인 17일 오후가 돼서였다. 당시 정전으로 인해 전화가 불통되고, 지하철이 운행되지 않아 교통이 두절돼 많은 관객이 영화제가 예정대로 열리고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웠고 극장까지 오기도 힘들었던 것. 이 때문에 주말 관객동원은 예상보다 훨씬 적어졌다. 그러나 주말 상영작품 중 <오아시스>와 <질투는 나의 힘>, 그리고 주경중 감독이 초청돼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 <동승> 등은 정전사태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과를 거뒀다.

KoFFo의 창단 멤버인 심보선씨는 “정전사태가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올해 상영작 중 다양한 장르의 작품성이 높은 영화들이 많아 좋은 반응을 얻었다”며 “이번 정전 때에도 관객이 지속적으로 영화제를 찾아줘, 지난 2년간 뉴욕한국영화제로 인해 고정적인 한국 영화팬층이 형성되고 있고, 영화제로도 확실히 정착이 돼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주경중 감독 질의응답 시간 ‘북적’

역시 멤버인 노광우씨는 지난 1, 2회 행사를 찾았던 관객이 올 영화제에도 꾸준히 찾아와주었다고 밝혔다. 영화제 기간 중 관객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노씨는 “올해 초청작품들 중 <오아시스>와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가장 큰 인기를 끌었고, 이외에도 <로드무비> <동승> <나쁜 남자> <YMCA야구단> <질투는 나의 힘> 등의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고 말했다.

특히 <오아시스>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처음 접한 관객은 올해 ‘시네마서비스’의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초청된 <초록물고기>를 서둘러 예매하기도 하는 등 ‘이창동 마니아’가 생기기도 했다. 한 뉴욕의 배급사 관계자는 <오아시스>를 관람한 뒤 이 작품의 미국 내 배급에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빌리지 보이스>와 <뉴욕포스트>도 올 상영작품 중 <오아시스>와 <나쁜 남자> 등을 호평했다.

#@003#@ <마들렌> <광복절특사> <밀애> <선물> <결혼은, 미친 짓이다> <넘버.3> <투캅스> <대학로에서 매춘하다가 토막살해 당한 여고생 아직 대학로에 있다> 등이 상영됐다.

관객은 영화제 초청 게스트로 참석한 주경중 감독에게 캐릭터들의 내면세계는 물론 불교철학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불교 철학사를 공부했다는 한 관객은 “한국의 불교철학은 다른 나라와 차이가 있는 것 같다”며 주 감독에게 그 차이점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또 영화를 보면서 무척 울었다는 한 여성관객은 주 감독에게 “이런 영화를 만들어줘서 너무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관객은 <동승> 상영 뒤 10여분 동안 열린 질의응답 시간이 짧았는지, 복도까지 따라나와 한참 동안 질문을 했다.

미국시장 진출의 교두보 도모할 때

올 영화제에는 약간의 관객층 변화가 있었다. 지난 1, 2회 때 ‘앤솔로지필름 아카이브’에서 행사를 개최했던 KoFFo는 올해 행사를 교통편이 편리하고 시설이 더 좋은 쿼드시네마로 장소를 옮긴 것. KoFFo 관계자들에 따르면 지난 2년간 주로 젊은 영화팬들이 주를 이뤘다면, 올해는 중장년층 관객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장기적인 측면으로 볼 때 이같은 관객 연령층 확산은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뉴욕한국영화제 초청작품 중 8편을 선별, 3일간 특별 상영을 한 BAM 로즈시네마에서도 이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이번 행사를 담당한 BAM의 플로렌스 앨모지니는 “지난해보다 훨씬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고, 영화제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어 대단히 만족스럽다”며 “앞으로도 KoFFo와 함께 한국영화를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은 이제 뉴스가 아니다. 그러나 미국 시장 내 진출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지난해 뉴욕한국영화제 이후 뉴욕에서는 <취화선>과 <집으로…> <고양이를 부탁해> <섬> 등이 개봉됐다. 박스오피스에서 그다지 좋은 흥행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뉴욕한국영화제와 마찬가지로 한국영화를 알리고 고정 관객층을 확보하는 또 하나의 준비단계로 충분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단기간에 현실적이지 못한 결과를 바라기보다 기존 관객층을 지속적으로 넓혀가는 것은 물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체계적인 홍보와 마케팅 전략으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결과를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데이비드 생_자원봉사자“자유분방한 캐릭터와 이야기에 푹”

맨해튼에서 활동하고 있는 홍콩 출신 사진작가 데이비드 생(David Tsang·38)은 올해 들어 처음으로 한국영화를 보게 됐다. 우연히 다른 영화제에서 한국영화를 접하게 된 생은 뉴욕한국영화제 2003에 자원봉사하면서 더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었지만, 점점 더 한국영화에 대한 갈증이 생긴다고 한다. 이번 영화제를 통해 한국 문화를 많이 배울 수 있었다는 생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뉴욕한국영화제에 참여한 이유는.

얼마 전에 뉴욕에서 개최된 ‘아시안아메리칸인터내셔널필름페스티벌’에서 자원봉사를 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게 됐다. 한국영화는 <결혼…>이 처음이었지만, 이야기와 배우들 연기가 모두 마음에 들어서 한국영화를 좀더 보고 싶었다. 한국에 대해 예의 바르고, 약간은 보수적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솔직히 이 영화를 통해 한국에서도 성에 대해 이렇게 개방적이라는 것을 보고 놀랐다. 자유 분방한 캐릭터들과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그래서 한국영화에 대한 갈증이 생겼고, 이 때문에 뉴욕한국영화제에도 자원봉사를 자청했다.

뉴욕한국영화제가 다른 영화제와 다른 점은.

관객은 물론 스탭과 자원봉사자들이 모두 편안하게 서로를 대해주었던 것 같다. 다른 영화제처럼 더 많은 영화를 보려고 초조하게 스케줄을 짜기보다는 영화를 진짜 즐기는 관객이 많아 보였다. 스탭과 자원봉사자들도 쉬는 시간에 서로 한국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식사를 했는지 물어보거나 함께 식사를 자주해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내년에도 기회가 된다면 꼭 함께 일하고 싶다.

영화제 작품 중 재미있게 본 것은.

개인적으로 코미디나 캐릭터가 잘 표현된 드라마를 즐기는 편이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동승>과 <결혼은, 미친 짓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 <광복절특사> 등을 무척 재미있게 봤다.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홍콩에서 자랄 때에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고, 여행을 좋아해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다른 문화를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다. 이번 행사는 영화를 통해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 문화를 보여주는 데 큰 역할을 해준 것 같다.

마이클 조_코리안필름포럼 홍보담당 “진짜 인생을 발견했다”

법률회사 라이브러리언인 마이클 조(Michael Cho·29)는 한인 2세로 올해 코리안필름포럼에 멤버로 참여, 뉴욕한국영화제의 홍보를 담당했다. 지난해 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한 것이 인연이 된 조씨는 한국영화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영화제에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동포 2세의 눈으로 본 한국영화와 뉴욕한국영화제에 대한 반응을 살펴봤다.

뉴욕한국영화제에 참여한 이유는.

지난해 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본 한국영화는 LA에서 부모님과 함께 비디오로 오래전에 본 영화 3∼4편이 고작이었다. 지난해 뉴욕으로 이사한 뒤 친구도 사귀고 최근 한국영화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자원봉사를 했는데, 당시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코리안필름포럼에서 멤버 가입 제안을 했을 때 흔쾌히 수락했다.

영화제 준비를 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자세히 아는 것은 없었다. 왜 그 영화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그냥 스토리 라인이 좋다거나,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는 정도의 대답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영화제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다른 멤버들이 권해주는 한국영화 관련 서적을 읽고, 나름대로 리서치를 하게 됐다. 아직도 배울 것이 많지만 이제는 약간이나마 지적인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웃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열흘 동안 열리는 영화제를 위해 이렇게 오랫동안 준비를 해야 하는지 몰랐다. 진작 알았으면 안 했을 거다. (웃음) 지난해에는 자원봉사만 해서 자세한 내부 사항이나 멤버들이 얼마나 헌신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풀타임으로 직장을 다니기 때문에 시간을 할애하기 힘들 때가 가끔 있었다. 그렇지만 극장에서 한국영화를 보기 위해 줄 서 있는 관객을 볼 때 그동안의 피곤함이 사라졌다. 아마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한다.

관객의 반응은.

한국영화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영화팬들이 상당히 많았다. 한인뿐만 아니라 백인, 흑인, 중국인,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의 영화팬들이 감독 이름과 배우 이름을 알고 있는 건 물론이고, 이들의 다음 작품에 대해서까지도 알고 그 작품에 대해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는 고정적인 한국 영화팬층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 같다.

영화제에 참여한 뒤 한국영화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나.

영화제를 함께하기 전에는 단순히 영화팬이었는데, 지금은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 근래 개봉한 한국영화들을 보면서 항상 느끼는 것인데,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캐릭터를 중심으로 층층이 다른 감정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매번 다시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곤 한다. 극중 캐릭터들의 복잡한 이야기를 보다보면 꼭 진짜 인생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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