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하스미 시게히코 [2]
2003-09-05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임재철 |

세대를 내려와서 말해보자. 당신에 의해 알려진 감독이 바로 스즈키 세이준과 가토 다이다. 그런 감독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스즈키 세이준은 이미 잘 알려졌지만, 가토 다이의 경우는 한국 관객에게 낯설다.

----------하스미 시게히코(이하 하스미) | 스즈키 세이준은 전위적이다. 거칠고, 자유롭다. 가토 다이는 굉장히 클래식한 면이 있다. 가토 다이는 무성영화를 비롯해 영화보기를 무척 즐겨한 사람이지만, 스즈키 세이준은 자신이 감독이면서도 영화라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두 감독은 외국에서도 통할 수 있는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스즈키 세이준은 1981년에 최초로 소개했고, 가토 다이도 비슷한 시기에 소개했는데, 가토 다이는 이탈리아에서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

----------임재철 |

가토 다이의 영화 중 추천을 해준다면.

----------하스미 시게히코(이하 하스미) | <바람과 여자와 방랑까마귀>, 그 밖에도 다른 감독을 꼽자면, 야마시다 고오사쿠, 구도 에이이치 등이 외국에 소개하고 싶은 감독이다. 그렇게 소개하고 싶은 감독을 얘기하면 끝이 없다. (웃음)

----------정한석 |

그렇다면, 당신의 일본 영화감독 베스트 5를 꼽는다면?

야마나카 사다오,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우치다 도무 그리고 한명을 더 꼽는다면 마키노 마사히로. 혹시 마스무라 야스조라는 감독이 한국에 소개된 적이 있나?

----------임재철 |

아직 없지만, 곧 소개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는 영화를 좋아하는 시네필들이 많다고 할 수는 없고 영화를 볼 기회 측면에서도 일본에 비해 많이 뒤지는 편이다. 한국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영화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많은데, 시네필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그 두 가지가 일치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실제로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영화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뉴욕에 있을 때 느낀 점은 미국에 영화보기를 별로 즐기지 않으면서도 영화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었다.

----------하스미 시게히코(이하 하스미) | 그렇다. 영화연구는 영화가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시네필이 영화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요즘은 당신이 말한 그런 학자들이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많다. 영화를 보아야만 계기가 생긴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DVD가 해가 될지 이익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영화학교들이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들을 하는데, 세계 각국에서 그나마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사회주의권 영화학교뿐이다. 다른 자본주의 국가의 영화학교는 별 기능을 하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영화학교를 충실히 운영하면 좋은 감독이 나온다는 기대는 환상에 불과하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영화학교들이 많지만 과연 그것들이 영화의 미래를 약속할 수 있겠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자들 중에 수오 마사유키, 구로자와 기요시 등이 있는데 이들이 전문 영화학교를 나온 것은 아니다. 예산도 없이 시작했고, 그럼에도 좋은 영화를 만들었다.

----------정한석 |

구로자와 기요시, 수오 마사유키, 아오야마 신지 등이 당신의 수업을 듣고 감명받아 영화를 시작했다는 일화가 유명한데.

----------하스미 시게히코(이하 하스미) | 구로자와 기요시의 경우는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8mm영화를 만들던 작가였다. 다만 내가 충고해준 바는 오즈 야스지로를 좀 보라고 한 것이다. 수오 마사유키는 불문학도였기 때문에 불문학 수업에서는 본 적이 있지만, 글쎄 영화강의 수업에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오야마 신지의 경우는 1학년 때부터 문장력이 정말 뛰어났다. 맨 처음 제출했던 레포트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에 대한 것이었는데, 정말 굉장한 문장력이었다.

----------정한석 |

덧붙이자면, 한국에서는 ‘영화를 읽는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하스미 시게히코(이하 하스미) | 미국의 영화연구는 어떻게 읽을까 하는 점에 치우쳐 있다. 시각적인 문제들을 놓쳐버린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보이는지 자꾸 물어보면서 학생들에게 흥미를 자극했다. 읽는다는 것은 대상과 거리를 두면서 선별과 취합을 해야 한다. 물론 그것도 필요하지만, 기억에 담아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의 세대는 비디오가 없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영화를 보아야만 했다. 영화를 보는 모든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비디오는 단지 기억을 확인하는 작업일 뿐이다. 영화란 바로 그런 보는 것,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나 같은 ‘신경증환자들’을 위한 것이다.

" 돌멩이를 던지면, 새로운 상황이 발생한다.

하스미 시게히코 시네포럼 '포드와 던진다는 것 ' 요약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마의 질주’, 혹은 ‘남자들의 난투’ 그리고 ‘합창, 댄스, 행진’ 같은 누구나 반사적으로 상기해내는 그런 포드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오히려 한편의 영화 속에서는 사소한 세부로 나타나 쉽게 흘려버리게 되면서도 작품을 넘어서서 반복됨에 의해 확실한 의미를 띠게 되는 이미지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나는 포드적인 ‘주제’라고 이름붙이려 한다. 작품에 따라 그 의미도, 기능도 달라지게 되는 그 주제의 배치를 명확히 하기 위해 여기서는 존 포드 영화에서 ‘무언가를 던지는’ 장면을 정리해보려 한다.

다양성 | 존 포드의 영화에서 던져지는 물건들은 매우 다양한 것들로서 보통은 별로 던지지 않는 것들이다. <아파치 요새>에서 계곡 아래로 던져지는 위스키 병, <리오 그란데>에서 바위의 비탈진 곳에서 던져지는 통조림 등은 ‘던진다는 것’의 순수형태라 할 만한 상쾌한 운동감을 영화에 도입한다. ‘던진다는 것’이 전자에서는 시퀀스의 끝을, 후자에서는 그 시작을 알린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내러티브적인 구조 자체가 ‘던진다는 것’의 주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돌 | 땅바닥에서 작은 돌을 주워 던지는 것은 두드러지게 포드적인 몸짓의 하나이다. 그 표적은 두개가 있다. 첫 번째는 의도적으로 말을 향해 던지는 경우로 <역마차>의 존 웨인은 <황야의 결투>의 빅터 마추어 이상으로 돌멩이를 던지는 것이 채찍을 사용하는 것보다 유효하게 말을 달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서부극에서 말에게 돌을 던지는 동작은 극히 드물며 조지 뱅크로프트가 던지는 돌멩이에 의해 마차가 달리게 되면서 <역마차>가 끝난다는 것을 상기할 때 ‘던진다는 것’의 내러티브적인 기능의 중요성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돌멩이는 또 가까운 연못이나 강을 향해 절망적으로 던져지는 경우가 있다. <수색자>에서 사막의 호수를 향해 존 웨인이 돌을 던지자 마치 그 몸짓에 호응이라도 하는 듯, 그 앞의 모래언덕에 내털리 우드의 그림자가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가 땅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워 던질 때 포드의 작품에서는 반드시 새로운 상황이 생기게 된다.

행복한 몸짓 | 행복한 만남을 예고하는 몸짓으로 모자, 성냥 그리고 담배를 던지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황야의 결투>에서 모자를 던지는 행위는 <조용한 사나이>에서보다 큰 규모로 반복되며 던지는 남자를 주위의 여자에 접근시키게 한다. <롱 그레이 라인>에서는 여자의 머리로부터 모자가 떨어지는 순간에 남녀의 접근이 일어나게 된다.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는 그것이 어둠 속에서 램프를 켜는 주제와 맺어지며, <리오 그란데>와 같이 포옹의 전주곡이 된다.

비극적인 몸짓 | <리버티 발란스를 쏜 사나이>에서는 예외적으로 라이플 총이 두 인물 사이를 왕복한다. 이것은 포드에게는 불길한 이미지이다. 사실 그뒤 존 웨인은 주위에 동전을 집어던지게 되는데 그것은 <밀고자>에서 바닥에 떨어지는 동전처럼 주인공을 궁지에 몰아세우는 것으로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 어머니의 에이프런 위에 던져지는 동전의 행복한 의미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되는 몸짓이다.

미장센 | ‘던진다는 것’은 포드에게 드물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고독한 몸짓이고, 하워드 혹스의 <탈출>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로렌 바콜에게 던지는 성냥처럼 두 인물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을 성립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 사실은 포드적인 인물이 집단의 이익에 봉사하는 개인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흉포한 고독을 자신속에 감추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던진다는 것’은 보는 자를 ‘이야기’와는 다른 ‘연출’(미장센)의 영역으로 불러들이는 주제론적인 세부이고 그 의미는 작품마다 다르며 분노나 희열 같은 전혀 이질적인 개인의 정동적인 변화를 필름에 새겨넣게 된다. 오즈의 작품처럼 포드의 작품도 ‘내러티브’는 단조롭지만 그 ‘주제’의 의미는 극히 풍부하고 때로는 모순되기조차 한다. 그 풍부함과 모순을 앞에 두었을 때 우리는 포드가 아직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 영화작가라는 점을 다시금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정한석 mapping@hani.co.kr · 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하스미 시게히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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