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야비…냉소…, 배용준 변했다
2003-09-16
글 : 김영희 (한겨레 기자)

배용준(30)은 하얀 얼굴과 부드러운 미소 뒤에 단단한 고집을 숨기고 있는 배우다.

그가 텔레비전 연기자 생활 10년 만에 첫 영화로 선택한 작품은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모두들 의외라 했다. 배경이 조선시대인지라 상투 틀고 안경을 벗어야 했는 데다 충무로에 다른 배우의 이름이 공공연히 떠돌던 작품이다. 매니지먼트 회사를 포함해 주변에서 선뜻 찬성하는 이들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내가 먼저 시나리오를 찾아 읽고 영화사에 연락”할 정도면 옹골찬 고집 없이는 힘들었을 터. “원래 제가 친구랑 게임을 할 때도 조건을 불리하게 만들기를 좋아해요. 성취욕이 있잖아요. 승부사 같은 기질이랄까.”

<스캔들…>은 배용준의 10년 연기인생에서 하나의 ‘승부수’일지 모른다. 꼭 상투 틀고 수염 붙였서만은 아니다. 그가 맡은 역할은 정조시대 희대의 바람둥이 조원. 야심만만한 사촌누이 조씨부인(이미숙)과 내기를 걸고 열녀문까지 하사받은 정절녀 숙부인(전도연)의 유혹에 나선다. 세 인물 가운데 영화 속에서 가장 격렬한 캐릭터의 변화를 보여주는 이가 조원이다. “너무 부드럽고 착한 말투”라는 말을 몇번씩 들어가면서 그는 느물거림과 야비함, 그러면서 세상사에 냉소적이지만 후반부 비극적 사랑을 하는 조원을 통해 자신에게 숨어있던 팔색의 스펙트럼을 펼쳐보였다.

찍는 과정은 “단 한 장면도 쉽게 찍은 게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상투를 틀고 있으니 피가 안 통해 “생각이 마비될 것 같”았다. “나름대로 준비 많이 했죠. 조선시대 나온 영화부터 생활사 책들까지 다 뒤져보고, 근데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감정을 다 표현하는 게 힘들더라고요. 순서대로 찍지도 않고 후시녹음하는 것도 낯설었고….” 배용준은 영화 ‘신인’임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여러 역을 해왔지만 사실 제 이미지는 하나죠. 아마 내 색이 파랑색이라면 이제까진 그 색과 비슷한 색을 덧칠해온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이번 영화는 아주 다른 원색일 거에요. 앞으론 이렇게 다른 원색을 칠하고 싶어요.”

90년대초 충무로에서 연출부로 시작한 그는 “유학갈 돈을 마련하고 싶어”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전 끼 없어요. 노력이에요. 어렸을 땐 내성적이라 남들 앞에서 노래도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나를 사랑하는 팬들에 대한 책임감이 날 이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더라.” “이전엔 남들에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보이기도 했죠. 고집세고. 근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없어져요. 어떨 땐 내가 현실과 타협하는 게 아닌가 싶어 씁쓸할 때도 있지만…”이라면서도 그는 이제 “사람들과 깊이 오래가는 관계를 맺고 싶다”고 말했다. “나를 오빠, 아들, 친동생처럼 여기는 팬들”이 바꿔놓은 그의 모습이다.

배용준은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반자동 카메라엔 꽤 손길이 닿은 흔적이 보였다. 카메라에 대한 배용준의 생각은 바로 자신의 삶, 자신의 연기에 대한 생각이기도 했다. “디지털은 느낌이 싫어요. 뭔가 공들이지 않은 듯한 느낌이랄까. 디지털은 그냥 공짜잖아요. 마음에 안 들면 지워도 되고. 상이 한번 맺히면 이건 지울 수 없잖아요. 그래서 신중하게 눌러야죠.” 그 신중한 첫번째 선택, <스캔들…>은 내달 2일 개봉한다.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