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4]
2003-09-20
글 : 김혜리

快樂男女 담장을 넘다

조선 팔도 한옥의 세심한 콜라주 - 세트

“아흔아홉칸 집을 아예 지으면 안 될까요?”

처음 욕심은 그랬다. 팔도에 흩어져 있는 이름난 한옥을 둘러보았지만 카메라의 눈으로 뜯어보면 흡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월의 옹이와 생채기. 고풍스러운 멋은 있었으나 너무 낡고 보존 상태가 허술하여 현재 당당한 부호가 생활하는 저택에 걸맞은 위풍당당한 화려함은 스러진 지 오래였다.

논의 끝에 미술팀은 극중 드라마의 헤드쿼터 격인 유 대감 댁 안채 부용정(芙蓉亭)을 남양주 종합촬영소 실내에 건립하기로 했다(건축비 4억5천만원). 부용정과 더불어 영화의 50%가 이루어지는 조원의 별채, 숙부인의 우화당, 좌의정 대감 댁, 자근노미의 방 등 9개가량의 방 내부 세트도 지어졌다.

부용정의 설계는 코스튬드라마의 프로덕션디자인에 있어 고증과 창작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보여주는 일러스트레이션이라 할 만하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고 영화적으로 흥미로운 구상을 폐기하지도 않았고 원칙없는 퓨전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대신, “전문가가 정리한 양식은 그렇지만,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근거있는 상상도를 그린 다음 거꾸로 흔적을 찾아나서는 순서를 취했다. 지방마다 가옥의 정형이 있다지만 집주인의 성격과 취향에 따라서는 수만채 집 중에 특이한 구조가 없었을까? 사가의 집안에 연못을 꾸미는 법도나 중국식 실내장식의 풍습은 없었다고들 하지만 부유층에서는 그런 호사가 탐나지 않았을까? 이재용 감독과 정구호 프로덕션디자이너는 과연 심증을 굳히고 표적 수사를 통해 물증을 발견하는 이 방식이 마술처럼 들어맞았다고 뿌듯해한다.

부용정

다중적 자아를 드러내는 은근한 파격

유 대감 댁 안채에 해당하는 12칸짜리 건물 부용정은 미닫이문과 병풍을 걷을 때마다 코너를 돌 때마다 조씨 부인의 다중적인 퍼스낼리티가 한겹씩 너울을 벗는 “양파와 같은 공간”이다. 평면도 왼쪽에 돌출된 연못을 낀 누마루는 조씨 부인의 사교계 활동이 이뤄지는 전방의 무대이며 쇼윈도다.① 바깥주인이 기거하는 사랑채에나 가당했던 누마루, 건축적 관습을 무시한 연못까지 거느린 건물 부용정은 조씨 부인의 활동성과 권력, 기세를 보란 듯이 펼쳐놓은 건물이다. 누마루 왼편의 계단은 유 대감의 사랑채로 이어지는 통로. 당시 안채는 금남의 구역이었고 결혼한 부부도 외관상 별개의 건물에 살았지만 헤집어보면 편의를 돕는 지름길이 있었던 셈이다. 오른쪽으로 꺾어 대청과 들림문을 지나면 미닫이로 구분된 3칸짜리 내실이 나온다. 아늑하게 손님을 영접하거나 좀더 사적인 대화가 오가는 곳이지만 여전히 연출된 공간이다. 공식적인 안방인 침실 왼편에는 밀실이 숨어 있다. 병풍으로 입구가 가려져 있는 이 방은 평면도 위에만 존재하는 방으로 농염한 자줏빛으로 채색되었다. 용도가 수상한 또 다른 방은 누마루 뒤쪽 깊숙이 들어앉은 접대방. 손님용 침실로 쓰이는 이곳은 일종의 작업실(?)로 조씨 부인은 여기서 남편의 소실자리인 이팔청춘 소옥에게 음양의 이치를 교육한다.

부용정의 디자인은 창덕궁 낙선재의 도회적인 구조, 콤팩트한 색상을 본으로 삼았다. 일반 가옥보다 목재의 톤을 진하게 잡았고, 좋은 목재를 오래 쓰면서 색이 진하게 먹어들어간 오동나무 재질감을 내기 위해 식용유 450병을 손으로 기름칠하는 수고를 무릅썼다. 누마루는 호남 지방, 처마는 경기 지방 하는 식으로 각 지방의 가옥 스타일에서 가장 예쁜 특징을 골라 콜라주했다. 문살만 해도 방의 쓰임새에 따라 부용정에만 예닐곱 가지가 달리 쓰였다. 연못에는 연꽃과 수련을 띄웠는데 마침 겨울철이라 타이와 베트남에서 봉오리 상태로 수입해오는 소동을 치렀다. 개인 정원 뒤의 연못에서 뱃놀이를 하는 신은, 큰 강물에서 기생과 한량의 뱃놀이하는 풍속화의 한 장면을 다소 무리하게 옮긴 설정이다. 비원의 부용지가 후보였으나 왕실이 아닌 사가 배경이라면 촬영을 허락하기 곤란하다는 통보를 받고 진도 운림산방에서 촬영했다. 한옥은 본디 실내와 실외의 경계가 터져 있는 공간. 실내에 지어진 부용정 세트를 밝히는 것(조명감독 임재영)은 그만큼 예삿일이 아니어서 낮장면에는 통상의 세배인 300kW가 소모됐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소품들 #1

음식 | 엄격한 고증의 올바른 상차림

“사극을 보면서 상에서 전골을 끓이는 장면 본 적 있어요?” 그러고보니 기억에 없다. 요리 유학까지 다녀온 음식전문가이기도 한 정구호 프로덕션디자이너는, 다 만들어져 담겨 나오는 개념만 있었던 시대극의 밥상에 등장시킨 전골냄비를 자랑스러워한다. 정구호 디자이너가 절반가량 직접 만들어낸 음식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중에서도 가장 고증이 엄격한 부분이다. 기생집에 임금님 수랏상처럼 음식이 차려지고 제기를 사용하는 오류를 바로잡고 백자기, 놋그릇, 9첩 반상, 개다리소반 등을 정확한 크기와 상차림으로 경우에 맞게 썼다. 한편 풍류를 즐기는 기생집의 상에는 푸드 스타일링을 도입해 들꽃을 섞는 등 멋을 부렸다. 시각적 재미를 돋우는 간식거리도 심심치 않다. 녹차에 뻔한 떡, 한과 몇 가지를 곁들이면 족하던 보통의 디저트는 명함도 못 내민다. 송홧가루를 꿀물에 곱게 퍼뜨린 음료수 송화밀수, 밤과 대추를 으깨어 꿀과 섞고 잣을 박아넣은 다음 다시 본래 모양으로 빚은 율란과 조란이 입맛 까다로운 양반들의 손끝에 계피가루를 묻힌다. 다만 편집에서 우선적으로 잘려나가지 않을까가 주방장의 근심거리다.

화장도구와 놀이기구 | 문방구? 다 화장도구

문방구처럼 보이는 사진의 도구들은 단장에 쓰이는 물건들이다. 솔, 방망이, 붓, 소나무를 그을려 만든 눈썹용 목탄 등이 들어 있다. 몸단장에 심혈을 기울이는 조원에게는 수염을 다듬고 자르는 가위, 족집게, 빗만 한 꾸러미다. 박물관에서 대여가 여의치 않아 족집게까지 미술팀에서 직접 자료를 참조해 제작했다. 조원의 장신구 중 눈길을 끄는 소품은 상투관. 흔히 왕의 머리에서만 볼 수 있던 금속 재질의 물건이지만, 사가의 남자인 조원은 대추나무를 조각한 상투관을 쓴다. 극중 좌의정 부인과 숙부인이 하는 쌍륙(雙六)놀이(두편이 15개씩의 말을 가지고 2개의 주사위를 굴려 판 위에 말을 써서 먼저 나가면 이기는 보드게임. 서양의 백가몬)의 판도 영화를 위해 만들어졌다. 모두 영화 개봉 뒤 전시회를 가질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됐다.

가마 | 붉은 비단의 움직이는 밀실

지금의 3000cc급 승용차에 해당되는 조씨 부인의 고급스런 가마는 문짝과 외부에 손으로 꼼꼼히 자수를 놓아 장식한 자수가마다. 현재 인천공항 입국 통로에 전시되어 있는 가마를 제작한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주문 제작 뒤 대여하는 방식으로 영화에 등장했다. 붉은 비단으로 벽을 바르고 빨간 노리개를 장식한 움직이는 밀실. 극히 검박한 숙부인 가마의 내부와 대조적이다. 가마 내부장면은 조그만 세트를 지어 촬영했다.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1]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2]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3]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4]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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