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3]
2003-09-20
글 : 김혜리

숙부인 정씨

금욕의 푸른색

“남녀가 유별한데 발도 치지 않고 어찌 대면할 수 있겠느냐고 전하거라.”

열녀문을 하사받은 숙부인 정씨는 시집도 오기 전에 정혼자가 급사한 청상과부로 유행이나 치장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다. 사랑받지 못한 공허감을 사랑을 베풀어 채우려고 하는 그녀는 천주학에 이끌리며 봉사하지 않으면 독서와 수놓기로 소일하며 마음의 평화를 가꾼다. 물론, 천하의 능수능란한 유혹자 조원의 눈이 그녀에게 머물기 전의 이야기다. 숙부인의 테마색은 청아하고 금욕적인 푸른색이다. 몸에 붙이는 보석도, 광채나는 귀금속을 즐기는 조씨와 대조적으로 비취와 옥이다. 단정한 쪽머리를 유지하는데 흔히 사극에 쓰이는 일제 시대식의 칠보 비녀 대신 백동과 은을 쓴 비녀, 전문 장인이 옥을 덩어리째 깎아 이음새 없이 만든 비녀를 감상할 수 있다. 간결한 죽잠도 잘 살펴보면 끝의 섬세한 옥 장식을 볼 수 있다.⑤ 유행에 맞춰 일자 소매, 바짝 잘린 저고리를 맵시있게 입는 조씨 부인이 한심해할 정도로 숙부인의 저고리 도련은 길고 소매통도 여유가 있다.

그러나 조원을 만나 성애에 눈뜨고 천주와 인간의 인연에 값하는 남녀간의 인연을 깨달으면서 숙부인의 옷장에도 약간의 붉은 기운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조원이 그녀에게 선사해 정표가 되는 목도리도 빨간색. 결말에 이르러 그녀가 입은 치마는 처연한 핏빛이다. 숙부인의 화장은 언제나 노메이크업에 가깝지만, 조원을 만나러 외출할 때에는 엷은 볼연지가 뺨에 살짝 내려앉는다.

조 원

풍류로 덧입혀진 하얀색

“첫 번째 잘못은 나를 만난 것이오. 두 번째는 내 말을 귀담아 들은 것이오. 세 번째는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줬는데도 떠나지 않은 것이오.”

사촌누이 조씨 부인과의 사련(邪戀), 실패한 첫사랑은 조원의 인생 전반을 요약하는 상징적 사건인지도 모른다. 조원은 학문에도 능하고 무공까지 높은 강한 남자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조선 양반사회와 자신이 서로를 용납할 수 없을 거라는 견고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의 공격적 에너지는 세련된 취향과 예민한 감각으로 발현되고 남는 여분은 연인의 손길을 원하는 사대부 부인이 기다리는 밀실에서 쓰인다. 조원의 의상은 여인들에 비해 단조롭다. 그는 백색과 진한 감색 두 가지 색깔의 옷만입는다. 하얀 옷은 세상 사람들에 눈에 비치는 카리스마와 매력이 넘치는 바람둥이 조원의 옷이다. 반면 심리적으로 언뜻언뜻 음영이 드러나는 순간에는 백색과 강한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감색 옷이 등장한다. 백색과 감색은 초반부터 교차하면서 등장하고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감색의 인상이 진해진다. 조원의 옷은 다른 남자들의 것과 첫눈에 구분되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자들이 잘하지 않을 법한 붉은색의 허리띠에 호박을 조각한 추를 다는가 하면 은입사한 살을 쓴 비단 부채 같은 액세서리로 드러날 듯 말 듯한 포인트를 주고 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 정구호 인터뷰

조선 후기의 끝없는 화려함에 놀랄 거다

언제, 어떻게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 합류했나. 1998년 <정사>를 마친 직후다. <정사>를 하면서 불가능한 것들을 고안해서 영화 속 세계를 구성하는 SF나 시대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치밀하고 세련된 스타일의 사극에 대한 의욕도 감독과 일치했다.

<정사> <텔미썸딩> <쓰리>에서 보여준 미니멀한 스타일과 극히 대조적인 영화 아닌가. 실은 그렇지 않다. <순수의 시대> 같은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다채로운 요소를 써도 각각의 가치가 정밀한 조화를 이루면 미니멀리즘의 단아한 가치와 상통한다.

의상과 소품의 직접 제작을 고집해 비용이나 인력면에서 부담이 컸을 텐데. 처음부터 제작사에 약속받은 사항이다. 영화나 연극이라고 해서 눈속임을 하는 것은 싫다. 진짜를 보여주는 것도 영화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유산을 제대로 아는 데에도 외국에 알리는 데에도 은연 중에 작용하는 가치다. 현대극처럼 현장에서 없거나 부족하다고 즉석에서 조달할 수가 없어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고, 궁중사극이 아닌 사가 상류층의 이야기라는 점, 제한된 공간이 무대라는 점도 어려웠다.

고증과 상상을 결합하는 작업이었을 텐데. 전문화, 분화된 자료가 많지 않아 곤란을 겪었다. 그럴 때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이를테면 조원이 이를 닦는 장면에서 어떻게 생긴 칫솔을 써야 할지 지푸라기나 소금이 이용됐다는 문헌 외에는 자료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솔잎을 따 묶어 나뭇가지에 붙이면 향도 나고 닦는 기능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칫솔을 만들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당대 문화에 대해 디자이너로서 발견한 것은. 조사를 하다보니 조선 후기의 화려함이란 요즘에는 비할 수도 없이 끝이 없었다. 가진 자들의 부패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아름다운 물건들은 한 시대가 지닌 기술력, 디자인 파워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후대인에게도 그것을 알 지식의 권리가 있고, 현대 디자인의 발전에도 밑거름이 될 텐데 특정 소수만 그것을 소장하고 본다는 점이 안타까왔다. 그래서 더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1]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2]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3]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4]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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