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북미 최대 영화제로 성장한 토론토국제영화제
2003-09-23

다민족 문화의 조화를 관객과 함께 즐겨라

올해 28회를 맞는 토론토국제영화제는 시네마테크를 중심으로 도시의 자그마한 영화제로 시작, 벨캐나다(Bell Canada)와 돈독한 파트너십을 통해 조금씩 성장해 어느새 북미에서 가장 큰 국제영화제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차분한 성장의 가장 큰 뒷받침은 경제력만큼이나 영화제를 향한 토론토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과 반응이다. 특히 올해는 영화제 건물을 위한 대대적인 선서식까지 아우르면서 내실있고 튼튼한 영화제로 발돋움했다.

프로그램을 통해 토론토국제영화제의 성격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할리우드영화에서 독립·아프리카영화까지

올 토론토국제영화제는 9월4일부터 13일까지 총 열여섯개 섹션에 400여편의 영화를 소개, 상영했다. 이 다양한 섹션을 가만히 들어다보면 영화를 개최하는 도시와 묘하게 닮은꼴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미국과 달리 다민족 문화가 모자이크처럼 나열되어 조화를 이루는 캐나다는 영화제 프로그램 역시 모자이크처럼 나열되어 묘한 조화를 이룬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부터 독립영화까지, 미국영화에서 아프리카영화, 거장의 영화에서 신예감독의 영화까지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 특히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 아프리카영화를 ‘메이저’ 국제영화제에서 단발성이 아닌 고정 섹션으로 소화해내는 것은 토론토영화제만의 특징이다.

제3세계의 거장감독을 소개하는 삼인삼색 디렉터의 스포트라잇 섹션에서는 시적 영상미로 알려진 터키 감독, 오머 카뷰어(Omer Kavur), 제키 데머큐부즈(Zeki Demirkubuz), 누리 빌제 세일란(Nuri Bilge Ceylan)의 대표작을 각각 즐길 수 있다. 내셔널 시네마 섹션에서는 오늘날 다시 부활한 브라질의 시네마누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상영되는 <카란디루>(Carandiru)나 <신은 브라질 사람이다>는 이미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터키와 브라질을 이어, 흑인 문화와 미학을 다룬 플래넷 아프리카 섹션은 6회째 지속적으로 한 섹션으로 자리잡고 있다.

경쟁이 아니라 축제, 발 가는 대로 즐긴다

토론토영화제는 언뜻 보면 다른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들이 많다. 5월에 개최된 칸에서 비슷한 시기에 개최되는 베니스영화제, 다가올 부산영화제의 라인업까지 보자. 겹쳐 보이는 영화제목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즉 이런 ‘영화제 거물급’ 영화들은 칸이나 베니스에 먼저 짐을 풀고 토론토로 ‘쉬러’오는 경우가 많다. 이는 바로 토론토가 가진 비경쟁이란 성격 때문이다. 영화제는 우열을 매기는 장이 아니라 관객과 함께하는 축제하는 게 토론토리안의 사고다. 다만 선호도만 존재할 뿐이다. 이에 토론토는 영화제 폐막에 앞서 관객이 뽑은 영화를 집계해 관객 선택 영화(AGF People’s Choice award)를 발표한다. 올해 28회 관객이 선택한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다.

올해 토론토를 들린 ‘거물급’ 영화들을 프로그램별로 슬쩍 보면 우선, 영화제의 꽃인 특별전(Gala)에서 18편이 상영된다. 올해 부산에서도 볼 수 있는 캐나다 거장 감독 드니스 아르캉의 <야만적 침략>(The Barbarian Invasion)과 리들리 스콧의 신작 ‘코믹’영화 <매치스틱 맨>(Matchstick Man)이 있고, 니콜 키드먼과 앤서니 홉킨스가 커플로 등장하는 <인간 얼룩>(Human Stain), 로버트 알트먼의 춤에 대한 영화 <컴퍼니>(The Company, 제인 캠피온과 멕 라이언이 손을 잡은 <인더컷>(In the Cut)이 그들이다.

또한 90살의 노장 마뇰 드 올리비에라 감독의 <말하는 그림>(A Talking Picture),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시네마 베리테의 거장 앨런 킹의 <평화로운 죽음>(Dying at Grace), 자크 드와이옹의 <라자>, 케이스 골던의 흥미로운 ‘뮤지컬’ <노래하는 탐정>(The Singing Detective), 차이밍량의 <잘있어요, 용문객잔>, 새로운 미디어로 형식미를 추구하고 있는 피터 그리너웨이의 신작 <털시 루퍼의 가방> 시리즈 등 관객을 사로잡는 영화가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토론토의 이 비경쟁 방식은 여타 유명영화제들이 내세우는 ‘특별하고 고고한’ 이미지보다 관객이 풍성하게 즐길 수 있는 먹을거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즉 이 잔치는 영화제를 위한 영화제가 아닌 바로 관객을 위한 영화제인 것이다.

관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다운타운 극장가, 사람들이 캐주얼하게 늘어서 있다(
붉은 줄로 그은 것은 모든 매진되었다는 표시.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과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은 영화제 첫날부터 붉은 표시가 된 상황

줄서서 기다리며 즐기는 영화제

관객을 위한 영화제임은 극장 앞을 늘어선 이들만 슬쩍 봐도 드러난다. 줄지어 서있는 관객은 고교생부터 60살 이상의 노인들까지 다양하다. 특히 나란히 줄 서 있는 노부부 모습은 토론토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토론토의 더 큰 매력은 바로 러시라인(rush-line)에 늘어선 관객이다. 미처 티켓을 구하지 못하거나 또는 이미 매진이 된 영화를 보기 위해 그 시간대 극장 앞을 서 있는 줄을 일컫는다. 티켓을 가진 이가 모두 들어가고 난 뒤 빈 좌석 수만큼 겨우 몇명(많으면 20명 남짓) 들어가게 되는 이 줄은 보통 영화상영 전에 거리를 족히 두 바퀴 이상은 휘감고 있다. 몇 시간을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은 앞뒤로 서 있는 이들과 자신이 어젯밤 본 영화에서부터 기대하고 있는 영화, 자신이 거리에서 만난 영화배우들 등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쉼없이 나누고 있다. 영화를 기다리기 위해 서 있는 그 줄 자체가 이들에게는 영화제인 셈이다.

이런 시민들의 즐기는 태도에 입각해 영화제쪽이 내놓은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 하나로는 유명감독이나 배우가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한 작품을 모아 프로그래밍한 다이얼로그: 토킹 위드 픽처(Dialogues: Talking with Pictures) 섹션이다.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영화상영 전에 추천자가 직접 올라와 자신과 그 영화에 대해 관객과 서로 나누는 데 있다. 올해는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 알트먼의 <내쉬빌> 등이 캐나다, 독일, 브라질 감독에 의해 각각 설명, 상영되었다.

다음으로 재미있는 프로그램은 바로 미드나잇 매드니스(Midnight Madness) 섹션이다. 이 섹션은 보통 밤 11시55분에 상영이 시작해 새벽 2시경에 끝나는 프로그램으로 엽기적이고 이색적인 때론 공포스런 영화들에 집중한다. 올해는 미이케 다케시와 쉬미주 다케시의 엽기적 공포물에서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까지 다양한 이색 장르들이 선보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등 한국영화 5편 걸려

지난해 임권택 감독이 거장전에 초대받은 것에 이어, 올해 한국영화는 각 섹션을 아울러 총 5편이 토론토행 비행기를 탔다. 각각의 영화가 개성이 강한 만큼 그 앞에 늘어선 관객 역시 각자 다른 성격을 보이고 있다. 우선, 동시대전에 자리잡은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은 이미 한국에서 화제작으로 입소문이 난 덕에 현지인보다 동포들 사이에서 완전 매진소동이 벌어졌고, 외국인들로 장사진을 이룬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그의 브랜드 네임이 외국에서 더 많은 마니아층을 두고 있음을 드러낸다. 디스커버리 섹션에 초대받은 박경희 감독의 <미소>는 비평가의 주목을 받았다. 토론토 유력 일간지인 <토론토 스타>는 <미소>에 대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섬세함을 이미지로 드러낸 뛰어나고도 난이도 있는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드나잇 매드니스 섹션에 상영된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는 페스티벌 데일리의 한면에 올해 영화제 중 가장 엽기물이라는 평이 실리기도 했다.

끝으로, 토론토영화제 팀은 이 토론토국제영화제뿐만 아니라 봄에는 스프라켓토론토어린이국제영화제(sprockets Toronto International Filmfestival for Children)를 통해 어린이와 학부모를 대상으로 우수 고전과 동시대 영화를 상영한다. 또한 매달 개최하는 시네마테크에서 고전과 회고전을 개최하고, 영화도서관(www.filmreferencelibrary.ca)을 운영해 손쉽게 학생과 관객에게 다가간다. 그 외에 배급 서킷과 톡시네마(Talk Cinema)를 운영해 한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관객과 나눔의 자리를 갖는다. 엄밀히 말하면 토론토영화제는 지속적인 활동의 성과물 중 하나에 불과한 셈이다. 또한 영화제는 영화제를 위한 모임이 아니라 끊임없이 관객과 영화를 손쉽게 만나도록 하는 하나의 수단이자 즐김의 장이다.

<인더컷>기자회견(2003년 9월9일 화요일)“여성적 누와르 필름이다”

남성이 장악한 스릴러 장르에 도전했다고 의견이 분분하다. 또 한편으로는 장르적으로 규정짓기에는 너무 다양하다는 의견도 있다.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가.

제인 캠피언: 스릴러 장르는 가장 본능적인 장르이다. 우리 삶의 어두움과 분출하는 성적 에너지는 이를 더 어둡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여성, 남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다. 파커(프로듀서)의 해석에 따르면 이 영화는 남성성보다는 여성적 욕구와 갈망을 드러내는 누아르 필름이다.

멕 라이언: 장르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크게 보면 인간의 관계에 대한 영화이다. 내가 연기한 파니는 고루한 영어 선생으로 일상을 살아가다 갑자기 연쇄살인범의 눈에 들게 되고, 강하고 섹시한 검찰과도 사랑에 빠진다. 스릴러 장르라기보다 그녀가 겪는 감정에 관한 영화다.

멕 라이언에게 있어 파니 캐릭터는 많은 변화가 필요했을 텐데… 파니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나.

멕 라이언: 파니는 마음을 많이 다쳤고, 모든 종류의 슬픔을 가지고 있는 여자다. 그녀는 세상에 많이 실망하고 버겨워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녀를 다치게 한 그 장소로부터 다른 사람과 교감할 수 있다. 이 역은 나에게 하나의 큰 실험이었다. 인간관계와 아주 독특한 어떤 여성적 슬픔과 연결짓는 시험이랄까. 물론 그녀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아주 많은 기쁨도 있었다.

검찰로 분한 루팔로는 이 영화에서 여성성을 어떻게 소화시키고 있나.

마크 루팔로: 이 영화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아주 잘 조화시키고 있다. 제인은 조화의 지점을 명확하게 알고 있고 그걸 배우에게서 뽑아낸다. 경찰관이 가진 육체적이고 난폭하고 거친 힘을 연인인 여성에게 시, 언어, 사랑을 주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제인은 함께 일한 5명의 배우들에게 그들 경력을 통틀어 경험하지 못한 뭔가를 끌어냈다. 우린 모두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고, 그 경험은 하나의 혁명 같은 것이다.

토론토=글 이승민/ 자유기고가 behere_min@hotmail.com·사진, 촬영협조 김규남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