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인터뷰]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이재용 감독
2003-09-26
글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오는 10월2일 개봉하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제작비 65억원짜리 블록버스터형 사극이다. 캐스팅도 호화롭다. 탤런트 배용준의 영화 데뷔작이고, 연기력 좋은 여배우 이미숙·전도연이 이 ‘신인’을 양옆에서 떠받친다. 그런데 내용은 예사롭지가 않다. 정절을 중시하고 남녀상열지사를 금했던 200년 전 조선 사대부 집안 속으로 들어가서는, 그 질서를 조롱하고 질시한다. 이런 불경한 이야기에, 20억원을 들여 정성스레 마련한 소품과 세트로 그 시대 양반층의 풍류와 퇴폐를 화면 구석구석에 담아놓은 이 독특한 사극은 온전히 이재용(38) 감독의 머릿 속에서 나왔다.

연하의 남자를 사랑하게 된 유부녀의 이야기를 멜로의 틀에 맞춰 깔끔하게 풀어낸 데뷔작 〈정사〉에서 이재용은 장르적 관습을 잘 활용해 나갈 감독처럼 보였다. 두번째 나온 〈순애보〉는 정형화한 이야기틀을 던져버리고 일상성을 전면에 내세운 뜻밖의 영화였다. 세번째 영화 〈스캔들 …〉은, 내용은 흔치 않지만 이야기 전달에 충실한 어법 자체는 낯설지가 않다. 양식미를 중시하는 화면 정도를 빼면, 그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공통분모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 감독 스스로 한 특징을 꼽았다. “사랑의 아름다움과 허망함이랄까. 사랑은 아름다운 것 같으면서 허망하다. 그걸 모를 때 사랑은 좋은 건데, 알고 나면 한동안 허망하고. 〈스캔들 …〉의 조씨 부인은 그걸 일찍 알아버린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 대신 게임을 한다.”

‘사랑이 있냐 없냐’는 ‘신이 있냐 없냐’와 같은 질문

이 감독의 말로, 〈스캔들 …〉의 갈등구도는, 원작소설인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의 그것을 충실히 옮겨왔다. “사랑할 때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가 된다. 사랑을 권력으로 보면 먼저 사랑에 빠지는 쪽이 지는 거다. 이런 룰에 기초한 게임이다.” 자신은 사랑에 빠지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유혹하는, 그래서 종종 양순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마는 조씨부인과 조원은, 어찌 보면 사랑에 빠지기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영화는 끝간 데 없는 게임으로 파국을 맞고야 마는 이 둘을 안쓰럽게 비추지만, 한쪽에선 이들의 게임과 사랑의 경계가 어딘지를 되물으면서 사랑의 본질을 의심하기도 한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존재 나는 아직 답을 못 내린다. 〈정사〉에선 사랑이 운명이냐 의지냐를 물었지만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열어놓을 수밖에 없다. 사랑이 있냐 없냐 그건 마치 신이 있냐 없냐와 같은 문제로 보인다. 신을 믿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걸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설명되지 않는 것 아닌가.”

사극 찍기의 어려움

이 감독의 머릿속에서 〈스캔들 …〉의 출발은, 원작소설이 아니라 ‘조선시대’였다. 교과서의 추상적인 지식을 넘어, 그 시대의 생활문화를 제대로 재현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존재를 묻는, 어찌 보면 포스트모던한 이야기를 조선시대로 끌고 왔다.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 어려움이 한둘이 아니었다. “야외에 나가면 전봇대 등등으로 카메라 댈 데가 없고 차소리 등등 소음이 심해 동시녹음도 못한다. 완전히 실내장면으로만 갈까 생각도 했다. … 실내장면도 서양 사극 같으면 의자에 앉아서, 또는 서서 말하고 공간도 넓어서 동작과 동선이 자유롭다. 여기선 방바닥에 앉아서 말하니까 동선이 안 나온다. 귓속말 하려면 기어가게 해야 한다.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장애가 있더라.”

말이 고어체이고, 인물들 간의 편지로 구성된 원작소설을 따라 대사가 무척 많은 것도 난점이었지만 이 감독은 이걸 장점으로 바꿔놓았다. “(편지 내용을 독백으로 읽는) 문어체의 대사가 사극의 옛말투로 인한 긴장감의 저하를 해결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신을 알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과 당신을 사랑하면서 마음을 돌리는 것, 이 두가지는 내게 불가능합니다’ 같은 말은 서양적인 표현이고 일상에서 안 쓰는 거다. 그런데 그 문어체가 주는 맛이 있다. 대사가 많은 탓에 배우들이 겁먹었지만, 막상 촬영 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만들고 싶은 영화가 너무 많아

나이답지 않게 동안이고 동그란 눈 안에 호기심이 가득해 보이는 이 감독은 1991년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할 때, 자신이 일관된 주제를 천착하는 감독은 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한 길을 가는 감독들 멋있지만, 나는 호기심이 잡다해서. 어쨌든 내가 만든 영화들이니까 일관된 무언가가 있겠지만, 나는 장르영화들을 내 식으로 풀어내는 데 관심이 많다.” 비구니의 이야기를 다룬 코미디를 구상 중이고, 뮤지컬도 생각 중이라고 했다. “〈순애보〉처럼 소소한 일상사를 다룬 개인적인 영화를 좋아하지만, 기본적으로 관객들이 즐거워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러면서도 〈스캔들 …〉 촬영 때 생각을 밀어붙여 완전히 실내장면으로만 이뤄지는 사극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왕의 하루를 다큐멘터리처럼 쫓아가는 거다. 이야기 같은 건 신경쓰지 않고, 그가 세수 어떻게 하고 옷은 누가 입혀주고 등등을 재현해 담는 거다. 재밌지 않냐 투자자가 안 나올 테니까 정부나 박물관 돈 받아서 ….” 말하다가 “아! 머리 복잡해지네” 하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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