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조건에 대한 기독교적 통찰
사실 또 하나의 김기덕론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최근에 출판된 <김기덕-야생 혹은 속죄양>(행복한 책읽기 펴냄) 속 몇몇 글들을 포함해 이미 훌륭한 김기덕론들이 많이 나와 있는 상황에서 그의 열렬한 옹호자가 아닌 나까지 별 알맹이 없는 글을 보태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김기덕은 그의 영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자꾸 말하고 싶게 만든다는 점에서 ‘좋은’ 감독이다.
이제 쓸 글은 신작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나 김기덕 감독에 대한 비판도 옹호도 아니다. 그저 그의 모든 장편영화를 다 본 한명의 관객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달리 보기 위한 역설적 글쓰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달리 보기 위해서라면 때론 억지로라도 비틀어볼 필요가 있다.
1.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불교영화다?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오히려 기독교영화에 가깝다. 다만 이 영화는 불교적 소재를 채택하고 스님을 주인공으로 삼았을 뿐이다. 반야심경이 나오고 다비식(茶毘式)이 나오고 반가사유상이 나온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핵심엔 ‘악업의 반복’이 있다. 김기덕 감독은 계절의 순환에 영겁회귀하는 업(業)을 겹쳐놓고 있다. 하지만 힌두교와 불교의 핵심인 ‘업’은 이 영화에서 도리어 기독교적 세계관에 더 가깝다.
이 영화에서 첫장 ‘봄’의 동자승과 마지막장 ‘그리고 봄’의 동자승은 모두 물고기, 개구리, 뱀의 몸에 돌을 매다는 짓궂은 장난으로 새로 업을 짓고 또 이어간다. 이때 이 영화 속 업의 사슬은 한 사람의 전생과 현생의 관계(불교에서의 윤회)가 아니라 수십년의 시차를 둔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관계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동자승의 동일한 행동은 얼핏 불교의 윤회와 관련 있어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이란 악마성을 타고나게 마련이라는 탄식에 기반한 ‘반복’의 의미를 지닐 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두 동자승의 삶은 유사하게 맞물리도록 의도된 구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관계가 없다. 그저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업을 짓고 그 업의 사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기나긴 삶을 살아갈 뿐이다.
또한 그 악업을 시작하는 것이 어린아이라는 사실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질 수 없는 어린아이의 악행이 업의 시작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인간이 원죄를 짊어지고 태어난다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다르지 않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으로 기능하는 돌은 바로 기독교의 원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끈으로 연결된 돌에 끌려다니거나 끌고다니지만, 사실 그들에겐 본질적으로 ‘돌’은 있어도 ‘끈’은 없다. 물론 기독교는 ‘돌’의 종교요, 연기(緣起)를 말하는 불교는 ‘끈’의 종교다.
김기덕은 언제나 기독교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는 죄책감이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 모든 악행은 죄책감을 다루기 위한 필요조건일 수도 있다. 피학적인 어떤 ‘죄인’들은 죄책감을 느끼기 위해 일부러 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김기덕 감독의 늘 패배하고 마는 인물들은 본성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기독교적 인간형들이다. 오죽하면 기독교 문화권은 ‘mortal’(죽을 수 밖에 없는)이란 단어까지 탄생시켰을까.
유럽에서 김기덕 감독이 상대적으로 더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엔 혹시 이런 것도 있지 않았을까. 외양은 동양적이되 속내는 지극히 실존적이고 기독교적이라는 점 말이다.
2. 김기덕은 이미지로 승부한다?
글쎄. 물론 김기덕 감독은 그 어떤 한국 감독보다 강렬한 회화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감독으로서 그는 사실 보여주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일반적인 평가와 달리, 그는 이미지에 집중하느라 이야기를 소홀히 하는 감독이 아니라, 이야기를 강렬히 전달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는 감독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누구 못잖게 이야기를 중요시한다. 그가 만든 영화들의 스토리를 요약하다보면 줄기가 명확히 잡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감독으로서 그의 뛰어난 점은 빼어난 이미지 조형술에도 있지만, 이야기틀을 잘 만들어낸다는 데도 있다. 과묵한 그의 주인공들과 달리, 화자로서 그는 다변에 웅변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의 이야기 재능이 틀을 만드는 데는 적합하지만 그 틀에 살을 붙이는 데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그간 수많은 평자들의 지적을 받아왔지만, 여전히 그의 영화 속에서 여지없이 반복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만 해도 설득력이 약한 설정이나 장면 연결이 수도 없이 발견되지만, 이미 많은 분들이 거론했으니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공식처럼 말해보자. 김기덕 영화는 우화에 가까워질수록 좀더 좋아진다. 이는 물론 그의 인간이해와 세계인식이 귀납적이라기보다는 연역적이고, 그가 하려는 이야기들이 궁극적으로는 우화와 신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화에 가까워질수록 좀더 좋아진다는 말에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이는 이야기에서 디테일을 제거할수록 그의 영화가 더 좋아진다는 뜻을 품고 있기도 하다. 우화와 신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에 붙은 살이 아니라 덩어리로서의 이야기 토막이요, 뼈대 자체다. 개인적 견해로는 이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 중 가장 중요한 영화는 <악어>였고 가장 뛰어난 영화는 <섬>이었다. 그리고 그의 영화 이력에서 최저점은 <해안선>이었다(그의 영화 중 평단에서 가장 큰 찬사를 받은 작품은 <수취인불명>이었지만, 개인적으론 동의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은 김기덕 감독의 약한 이야기 디테일은 이야기보다는 다른 점에 더 치중한 결과라고 본다. 즉 창작자로서 선택의 문제이지 우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 달리 그는 이야기성을 배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영화를 만든다. 이야기의 모티브나 진행방식으로 볼 때, 강력한 이야기성을 스스로 초대하고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화술의 무능은 그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약점이 되고 만다. 형식은 기능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살을 제대로 붙이지 못하는 모티브는 결국 도식이 된다. 김기덕 감독은 핵심을 간파하는 능력이 있다. 그는 “세상은 늪이고 우리는 그 늪의 악어”라고 멋지게 말할 줄 안다. 그러나 풍부한 디테일을 발라낸 핵심만 간직하기엔 그는 이미 너무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높이 나는 새는 멀리 본다. 김기덕 영화는 높이 날고 멀리 본다. 그러나 그 대신 낮게 나는 새는 자세히 본다. 자세히 보기에는 김기덕 영화는 종종 땅에서 너무 높이 떨어져 있다.
3. 김기덕은 이제 변하려 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결국 이 영화 속 다섯개의 장 중 ‘겨울’ 부분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린 것 같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성공한 김기덕 영화’로 보지만, ‘겨울’ 만큼은 예외였다. 웃통을 벗은 채 선보이는 그 긴 체력단련 장면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돌을 굳이 산으로 끌고가는 그 날비린내나는 상징으로서의 고행은 그렇다쳐도, 그 순간 굳이 동자승 시절 돌에 묶어두었던 개구리가 바둥대는 모습을 굳이 삽입해 업(業)의 녹슨 사슬을 관객의 코앞에 대고 흔드는 조바심은 또 어떤가(김기덕 감독은 음악이 먼저 있었고 그 음악에 맞춰 장면을 찍었다고 하지만). 그 장면에서 구성지게 찢어지며 흐르는 <정선아리랑>을 깔아둔 것은 또 얼마나 빈약한 음악적(혹은 영화적) 상상력인가.
하지만 이 작품은 김기덕 감독에게 쉬어가는 영화이고 되돌아보는 영화이다. 세상을 향해 고함에 가깝게 외쳐왔던 그는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폭압적 세상에서 견뎌내기 위해 변화시키기를 꿈꾸었던 인물들의 패배 기록을 통해 분노를 폭발시켜왔던 그는 이제 그 패배의 한 이유를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찾아내려 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피부로 생각하지 않은 김기덕 감독의 유일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겨울’의 조야함에 대한 미스터리를 난 그렇게 이해한다. 어차피 이 영화는 김기덕 감독의 지극히 사적인 영화다(애초엔 안성기씨 같은 배우가 그 연기를 맡아줬으면 했다지만). ‘겨울’에서 김기덕 감독이 직접 장년의 주인공으로 연기까지 해냈다는 사실은 이 영화에 대한 그의 태도를 말해준다. 감독이 배우로 등장해 매서운 겨울 추위 속 무거운 돌을 끌고 손수 산꼭대기까지 올라갈 때, 그 장면의 의미는 너무나 직접적이어서 객관적 분석이나 평가가 무의미해 보일 정도다. 그 순간 그는 더이상 영화 속 승려가 아니라 영화감독과 자연인으로서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는 김기덕 감독 그 자체로 보인다.
영화 속 주인공이 저지른 잘못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동자승 때 장난삼아 동물들의 생명을 가지고 논 것이고, 두 번째는 암자에 찾아와 요양하는 소녀와의 섹스에 탐닉한 것이며, 세 번째는 아내의 배신에 격분해 살인을 저지른 일이다. 일반적 기준으로는 잘못의 정도가 그 역순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로 묘사되고 있다(이 영화 속 주요 공간적 배경 밖에서 펼쳐지는 사건이긴 하지만). 이 작품 스토리에서 가장 극적일 수 있는 살인장면은 배제하면서, ‘봄’과 ‘그리고 봄’을 통해서 철없는 어린아이 시절 장난의 엄청난 의미를 두번 반복해 강조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극중 논리로 보면 살인과 섹스는 모두 악업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어린시절 악행의 결과에 불과하다). ‘겨울’에서 죄책감을 씻기 위한 고행을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결국 김기덕 감독은 주인공의 뒤틀린 삶이 그가 범한 잘못 때문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주인공의 처절한 참회는 인간이라는 조건 자체에 대한 게 아닐까. 어쩌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김기덕 감독의 통찰이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한명의 영화감독은 결국 평생 같은 이야기만 반복한다. 그러니 확고한 자신의 세계를 갖고 있는 감독이 애써 변화를 추구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자들의 관성적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을 다시 반복해보자. 김기덕 감독의 작품 세계는 이제 변할 것인가. 그는 고행을 마친 뒤 고승이 될 것인가, 아니면 다시 동자승으로 돌아갈 것인가. 질문을 마치자 곧바로 떠오르는 것은 첫장인 ‘봄’에는 동자승의 장난을 노승이 근심스럽게 쳐다보는 시선이 있었지만 마지막장 ‘그리고 봄’에는 그게 없다는 점이다. 노승의 시선없이도 과연 ‘그리고 봄’의 동자승은 ‘봄’의 동자승처럼 마침내 업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어쩔 수 없음’의 정서를 짙게 깔고 있는 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산의 정상에 올라앉은 돌부처상은 등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