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하고 있고, 모두들 알고 있으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있지.” 차가운 냉소를 감추며 이제 갓 소실로 입적할 한 풋내기 처녀에게 게임의 규칙을 한수 가르쳐주는 여주인공 조씨 부인의 말대로, 한때 대한민국에서는 ‘모두들 보고 있고, 모두들 만들면서도 모두들 못 본 척한’ 장르가 하나 있었다. 바로 토속 에로물. 1980년대 대표적인 인기를 누렸던 이 장르는 대개 두 종류의 내러티브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영화 <산딸기>나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처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여자에 대한 환상으로, 전형적으로 산골 출신의 무지렁이인 그녀는 자신의 육체를 소유한 남자들을 따라 인생 유전을 거듭한다(놀랍게도 안소영이 주연한 영화, <산딸기>의 이야기 구조는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한 영화 <말레나>와 한치의 오차도 없는 동일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 하나의 이야기 구조는 이들과는 반대로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여자에 대한 환상. 전형적으로 그녀는 정절을 목숨처럼 지켜야 하며, 그녀의 속옷 끈이 풀어질 때 그녀의 계급적 특권과 마음 깊숙이 가두어둔 욕망도 함께 해체돼버린다. 일종의 사대부 에로라 할 수 있는 이 장르에서 머슴-마님간의 성적 긴장과 해소는 내러티브의 중심에서 드러내놓고 관객을 유혹했다.
새로 나온 이재용 감독의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하 <스캔들>)는 어찌보면 80년대 유행하던 토속 에로, 그중에서도 사대부 에로의 전반부를 현미경처럼 확대해놓은 영화이다. 다만 이 정숙한 마님에게 파상 공세를 가하는 주체가 서슬퍼런 머슴에서 유유자적을 일삼는 양반 남정네의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바뀌었다는 정도일까. 전반부엔 코미디를 후반부엔 멜로를 배치하고, 그러면서도 고급 에로의 포장을 덧씌운 <스캔들>은 한 꺼풀 벗겨보면, 대한민국 관객이 좋아하는 모든 장르적 요소를 갈무리한 일종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이다. 이미 지난 시절, <과부>나 <피막> 같은 에로물들에 자주 등장하는 날선 은장도나 ‘소리를 지를 테요’ 같은 대사는 이 영화에서 오히려 진부한 클리셰로 사전 텍스트를 알고 있는 관객에게 웃음을 유발할 뿐이다. 금기, 억압, 그것이 분출할 때의 뜨거움, 사대부라는 ‘장막 안에 싸인 여인’이 주는 은밀하고 차가운 관능. 영화 <스캔들>은 겹겹이 가둔 여자의 육체를 내밀히 드러내는, 그 속옷 끈을 끄를 때의 판타지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서도 에로라는 어두컴컴한 응달의 욕망을 압구정 앤티크 스타일로 치장한 뒤, ‘누구나 보러 가고, 아무나 이야기할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누구도 부끄럽지 않게’ 만든다고 은밀하게 관객을 유혹한다.
그러나 신윤복의 춘화에 민화든 포르노든 그 이름에 상관없이 예술이라는 무게추를 놓기에 충분한 아름다움이 깃든 것처럼, <스캔들>에는 단지 에로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명품의 향기가 솔솔하다. 현대와 과거를 접목시킨 탁월한 스탭들의 감수성은 영화의 톤을 뒤바꾸는 쳄발로 음악, 마치 모차르트의 소타나를 연상케 하는 이병우의 음악과 좁은 옷고름이 살풋한 의상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이재용의 스타일에 대한 집착은 여전해서, 감독은 예의 <스캔들>에서도 <순애보>나 <정사>에서 보여주었던 탐미적 에로티시즘의 세계로 힘껏 발을 든다. 무엇보다도 이재용은 <스캔들>로 김대우 각본, 오정완 제작의 그 세계로 다시 진입하였다. 한마디로 무채색의 핏기없는 파리한 부르주아 가정에 갇힌 이미숙을 조선시대로 다시 불러내어 유채색 캔버스에 되살려낸 꼴이다.
관객을 인식하다
<정사>에서 동생의 남편이 될 연하의 남자를 만나고 온 날, 이미숙은 빨간 피망을 썰어 그것을 다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빨간 피망에 아무렇지도 않게 클로즈업을 살짝 던지는 이재용의 내숭을 보라). 그녀는 얼음같이 차가운 자궁 안에 자신의 욕망을 숨겨둔 것이다. 그 빨강이 <정사>에 나오는 거의 유일한 욕망의 증거물이었다면, <스캔들>에서 이미숙은 마음껏 욕망의 가마를 타고, 조원에게 서서히 마음을 빼앗겨가는 숙부인은 점점 분홍빛의 의상으로 몸치장을 하게 된다. 상류사회의 불륜이라는 공통 소재를 가지고 있으면서, <정사>가 부르주아의 은밀한 유혹에 관한 무채색 정물화라면, <스캔들>에 이르러서는 영화 장면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공들인 채색 춘화로 변한 셈이다.
이제 이재용은 세상에 대해 더 여유가 있어졌고, 시니컬해졌다. 그는 연애에서도 덜 사랑하는 쪽이 더 권력을 지닌다는 것도, 사랑에는 농밀한 게임과 잔인한 순진함이 함께한다는 것도 깨달은 듯이 보인다. 인간의 본능에 대해 갈파한 피에르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를 원전으로 해서가 아니라 ‘어쩌나, 마음은 권인호에게, 몸은 조원에게, 시집은 유 대감에게 온다’ 같은 기가 막힌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몸 따로 마음 따로인 인간의 본질에 능청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냉소와 연민이 교차하는 시점에서 피어나는 <스캔들>의 강력한 유머. 기실 이재용의 영화는 더욱더 시어졌다.
개인적으로 나는 <스캔들>의 상업적, 영화적 성공에는 감독이 이제까지 함께 작업한 이정재에게서 배용준으로 자신의 페르소나를 교체한 점이 적중했다고 본다. 그리고 제발 그것이 단지 배우의 교체나 배역의 교체가 아닌 캐릭터의 근본적인 무게 중심 이동이었으면 싶다. <정사>에서 <스캔들>까지, 이재용의 남자주인공들은 어딘가 늘 공통점인 면이 있었다. 그들은 물질에 대한 결핍감이 없으면서도 허무주의적이고, 음풍농월의 한가함 속에서 세상을 등진 인간들이다. 아버지가 집 한채 정도는 사줄 여력이 있고, 남자들간의 권력게임에서는 무능한 이들은 남는 시간에 여자들의 품에서나 심리적 위안을 찾는 유약한 인간들이다. 그러나 배용준이 분한 조원은 무엇보다도 세상에 대한 조롱과 가학을 가장한 피학적 나르시시즘이 있는 인물이다. 이전의 남자주인공 우인이 우연과 인연으로 다져진 순진남이라면 이번 조원은 조소와 원한으로 얼룩진 호색한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싫어 여자들을 농락하고 그 농락에서 얻은 손톱만한 권력에 대한 최면으로 남자들이 지배하는 이 세계의 패배자라는 사실을 무효화시킨다. 그의 성적 행동은 권력적 행동의 실패 혹은 거부에 대한 끊임없는 취소인 셈이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부분을 체화하는 배용준의 능청스런 연기는 말할 나위 없이 <스캔들> 최고의 매력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재용은 이제 관객이라는 투명인간을 비로소 알게 된 것 같다. 근자에 본 한국영화 중 <스캔들>은 가장 미학적이고 안정된 화면짜기를 뽐낸다. 딱 앉은키 높이의 카메라는 백조의 몸짓과 통속적인 내숭이 함께하는 이 하늘하늘한 상류사회를 지그시 바라다본다. 미디엄숏에서 클로즈업까지 인물들의 근접 촬영이 유난히 많은 <스캔들>에서 배우들의 표정과 교차하는 시선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감독은 오직 관객만 볼 수 있는 인물들의 미소를 끊임없이 화면 밖으로 흘린다. <스캔들>의 본질은 소문이고, 소문은 경계의 담을 타고 넘나드는 음험함에 있다. 이재용의 영화형식은 정확하게 이러한 주제를 반영한다. 그래서 소름 돋은 여체를 훑어나가는 팬숏은 관객의 눈길이 되고 손길이 된다. <스캔들>은 단지 조원과 조씨 부인의 공모가 아닌 이재용과 관객의 공모와 <스캔들>이 되는 것이다.
멜로의 날개 위에 힘없이 주저앉다
그러나 여기까지이다. 딱 여기까지이다. 상류사회의 허식과 자기 기만에 사로잡혀 있음을 폭로하는 영화의 주제는 땀구멍에서 올라온 액취에 코를 쥐게 하기보다 어디든 샤넬 향수를 뿌리는 여자의 고고한 겨드랑이에 대한 반감과 같은 것이다. 이 영화에는 역설적인 순진함이 있다. 그 이름이 아사코든 숙부인이든 이재용의 여주인공들이야말로 <정사>의 이미숙과 한치도 가감없이 충성스럽게 이재용의 판타지를 지켜낸다. 다소곳한 자세와 포즈로 정서적 억압이 심한 어디에도 없는 여자. 숙부인은 밤장면에 등장하여, 환한 대낮 즉 고통이 증발되어버린 부르주아 세계, 조원의 세상에서 기꺼이 죽어간다. 가체없는 머리를 지닌 무채색인 이 여자는 <정사>의 이미숙과 똑같은 포즈로 갑작스런 키스에 얼어붙고 첫 정사 뒤에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래서 기어이 사랑의 승리인 숙부인의 자살은(그녀는 이 장면에서 비로소 결혼을 의미하는 넷째손가락에 반지를 낀다) 의당 조원으로 하여금 양반계급에서의 탈출과 자신의 페르소나에서 탈출을 완수하며 구원의 대의명분을 지켜낸다. 닫힌 미장센이 열리고 한옥의 담벼락이 강과 바다가 되며, 미디엄숏은 롱숏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얼음 구덩이에 남겨진 숙부인의 빨간 목도리에 가슴 아파하기 전에 생각해보라. 왜 이재용의 모든 영화는 공항의 출구를 비추는 비디오(<정사>), 달력 속의 사진(<순애보>), 춘화(<스캔들>)라는 비현실적인 기표에서 시작해서, 다시 브라질과 알래스카, 중국이라는 비현실의 기표를 향해 달려가는가?(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현실은 키치로 전락한다. <정사>에서 오락실이나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라는 포스터가 유부남과 총각의 연애담에 들러리를 서는 배경인 것처럼, <스캔들>에서 천주학과 양민 학살의 광풍은 <스캔들>에서 철저히 소품으로 전락한다).
이재용의 모든 영화는 사랑을 찾아 가장 먼 곳까지라도 가겠다는 사람들의 탈출기이다. 그리고 <스캔들>은 현실에서 소통이 되지 않자 사극의 힘을 빌려서라도 지극한 이상주의를 도모하려는 이재용의 탈출기이다. 세상상을 알아가며 오히려 더욱 견고한 사랑의 환상성을 견지하는 이재용이야말로 애니마(남성 안에 있는 여성성을 일컫는 분석학의 용어)의 월계관을 쓸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리하여 멜로의 날개 위에 힘없이 주저앉는 그의 영화는 보고나면 늘 한 떨기 조화를 손에 쥔 허전함을 떨칠 길이 없다. 그 부서질 듯 말 듯한 정교함과 섬세함과 취약성마저 마음에 든다면, 기꺼이 이재용의 영화에 얼굴을 묻으라. 심지어 그곳에서 당신은 은은한 진짜 향기마저 맡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