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아프냐,아프냐,아프냐,이유정의 <미나>
2003-10-08
글 : 박인하 (만화평론가)

이유정은 불운하다. 작품이 막 피어날 때면 여지없이 잡지가 폐간된다. 폐간의 상처를 채 추스르기도 전에 새로운 연재에 돌입해 작품을 망칠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작품마다 편차가 크다. 심지어 한 작품 내에서도 밀도있는 연재부분과 연재없이 완성된 부분이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유정은 여전히 한국 만화의 미래를 기대하게 해주는 작가며, 다른 작가와 다른 자신의 작품세계를 갖고 있는 작가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실험하며 진보하는 작가다. 이번에 단행본 1, 2권이 출간된 <미나>는 전작의 불안한 행보를 추스르고 안정된 완성도를 보여준 연재작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도 연재되던 잡지 <영점프>가 폐간되는 불운과 마주하게 된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미나>는 이유정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아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음과 직면한 공포, 나를 다스릴 수 없는 공포는 결국 내면의 상처를 만든다. 이 거대한 트라우마는 아프게 인간을 파괴한다. 목숨을 걸고 타인을 구하는 소방관이 있다. 거대한 불길에 갇혀 절망의 공포에 휘감긴 사람에게 다가가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하지만, 극한 죽음의 공포에서 구해진 사람들은 새롭게 살아가는 자신의 목숨을 쉽게 탕진한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소방관은 이제 자신이 구한 ‘망가진’ 생명을 회수한다. 미나는 생명회수자로 아버지에게 양육된 킬러다. 만만치 않은 설정이다. 어린 시절 미나는 아버지와 함께 킬러의 삶을 살아가느냐, 아니면 평범한 삶을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아버지를 선택한다. 무시무시한 흉기에 의해 상처투성이가 된 채 아버지에게 다가온 미나. 아버지는 “네가 다치면 나도 다친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라며 스스로 칼을 들어 자해를 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다모>)를 넘어서 더 처절하게, 더 큰 상처를 준다.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약속한다. “절대 죽지 않을 정도로 강해진다고. 보통 인간 따위와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삶도 죽음도 초월할 정도로 강해진다고.” 그리고 어린 딸은 아버지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극한 고통의 수련을 참아낸다.

등만 보는 사람들

하지만 <미나>에 등장하는 모든 관계는 비정상적이다. 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관계다. “네가 다치면, 나도 다친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라고 비장하게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아버지와 미나의 소통은 오직 타인의 삶을 회수하면서만 가능하다. 소통의 방법을 배우지 못한 미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소통의 부재다. 소통의 부재는 사람을 아프게 한다. 미나가 생명을 회수한 사람들도 모두 소통의 부재에서 자신을 파괴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미나>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아프다. 아버지와 소통이 단절된 채 오로지 생명을 회수하는 일로만 아버지에게 다가갈 수 있는 미나. 자신이 목숨을 걸고 구해내 사람들의 생명을 다시 원위치시키기 위해 어린 딸을 킬러로 양육한 아버지. 강해지려는 욕망에 자신을 내모는 태천. 폭력 앞에 굴복하며 미나의 호의를 배신한 철민까지.

이유정의 다른 작품도 그랬지만, <미나>는 더욱 도발적이다. 여고생, 하얀 종아리, 순백의 속옷까지 이유정이 반복적으로 집착하는 아이콘이지만, 주인공 미나는 우울함과 슬픔이 맞물리며 일본 만화의 미소녀와 구분된다. 숨겨진 욕망을 자극하지 않고 도발한다. 한때 이유정은 가늘고 섬세한 선에 집착한 적이 있다. 하지만 <미나>에서는 선에 힘이 들어갔다. 파괴된 인물들이 보여주는 섬세한 표정을 이유정의 거친 선이 담아낸다. 톤에 의한 명암의 표현보다 거칠게 활용된 펜선은 소통의 부재와 사람의 상처를 효율적으로 드러내는 데 기여한다. <미나>는 퍽 괜찮은 작품이며, 이유정 역시 퍽 괜찮은 작가다.

<미나>는 소통의 부재, 그리고 거기에서 시작된 사람의 상처를 드러내며 만화를 읽는 독자의 상처에 다가간다. <미나>는 질문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극한의 공포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남는 단절의 고통은 무엇인가, 가족은, 친구는,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우리에게 과연 무엇일까. 글을 쓰기 위해 <미나>를 반복해서 읽다 그만 울고 말았다. <미나>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한결같이 나에게 다가오는 상대방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기다림이 너무나 처절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내 모습이었다. 만화는 때론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기도 한다.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