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12명 감독의 야심만만 뉴프로젝트 [1]
2003-10-10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정진환
이 영화에 밑줄 쫙 네모 꽉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는 매년 60∼70편의 영화를 생산해왔다. 영화계에 돈이 넘치는 시기든 금융자본이 대거 철수하던 시기이든 제작편수의 변동폭은 크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투자가 많을 때 제작편수가 늘고 투자가 줄 때 제작편수가 주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영화는 자동차 찍어내듯 공장만 늘린다고 양산되는 것이 아닌 탓이다. 투입되는 자본과 생산되는 제품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한 공정은 시나리오를 만들고 배우를 캐스팅하고 스탭을 구성하는 매우 수공업적인 공정이 끼어 있다. 골방에 틀어박혀 한 장면 한 장면을 써가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의기투합하는 과정은 돈이 많아진다고 획기적으로 달라지기 힘든 일이다. 어떤 영화든 일정한 시간이 축적되지 않으면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10월의 문턱을 넘어선 지금, 제작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새 영화들의 면면은 그 같은 시간의 결과물이다. 대부분 내년에 개봉할 예정인 이들 영화는 적게는 1∼2년, 많으면 5∼6년의 기다림 끝에 카메라 앞에 서게 됐다. 이런 사정은 철저한 기획영화든 작가의 영화든 다르지 않다. 어쩌면 영화의 진실은 그들이 한편의 영화를 만들기까지 소요한 시간 속에 들어 있는지 모른다. 여기 소개하는 13편의 신작 또한 수년간 창작자들의 고민과 궁리가 쌓여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들 영화의 면면은 내년 극장가의 모습을 예측할 지표이기도 하다.

엽기적인 그 여자, 클래식 순애보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 곽재용 감독

- 이 영화를 만들기까지

곽재용 감독은 지금 행복하다. 영화감독에게 앞 작품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온다는 것은 놓칠 수 없는 행복이다. 더욱이 중국 전역에 개봉된 <클래식>까지 반응이 좋아 그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클래식>을 개봉한 뒤 곽재용 감독은 싸이더스 HQ의 정훈탁 대표에게 귀가 솔깃한 소재 하나를 들었다. “워낙 정 대표가 괜히 감동받도록 말을 잘하는” 탓이기도 하지만, 듣는 순간 곽재용 감독은 “나하고 잘 맞겠다”고 직감했다. 한마디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는 “<엽기적인 그녀>나 <클래식>보다 업그레이드”된 영화라고 그는 소개한다(제목은 이렇게 길지만 감독과 스탭들은 이 영화를 짧게 줄여 <여친소>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새로운 여자친구는 말할 것도 없이 전지현이다. 곽재용 감독 역시 전지현의 캐릭터가 “엽기적인 그녀와 다르면서도 또 같은” 이미지를 줄 수 있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여친소>는 <영웅>과 <와호장룡>의 프로듀서 빌 콩이 전액투자한 영화이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에서 동시 개봉을 추진 중이다. 현재 영화는 콘티가 완성된 상태이고, 두 주인공 경진과 명우가 여름여행을 떠나는 몇몇 장면도 이미 찍었다. 사실, 그동안의 촬영기간에는 이런 어려움이 있었다. “이상하게 물차가 처음 비 뿌리고 나더니 안 나오고, 차 와이퍼가 움직여야 되는데 안 돼서 다른 차로 바꿔 왔더니 그건 또 시동이 안 걸리고. 처음에는 뭐든지 잘 안 맞아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행운도 있었다. “비 올 때도 비를 더 뿌리고 찍은” <여친소>는 그 숱한 충무로의 태풍 피해 사례를 비켜갔다. “촬영하는 동안에는 비가 필요한 장면이었기 때문에 피해보다는 도움 된 게 더 많았던” 것이다. 4개월쯤 지난 내년 3월에 그 고됨과 행운의 결과물이 스크린에 담길 것이다.

- 이런 영화

<여친소>는 전지현이 펄펄 뛰는 여순경으로 돌아왔다는 점만으로도 <엽기적인 그녀>를 상기시킨다. 또, 때묻지 않은 총각교사로 캐스팅된 장혁이 그녀에게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다는 점에서는 사랑에 대한 <클래식>판 정의를 다시 한번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 영화가 무엇을 보여줄지 예상하기 위해서 <클래식> DVD에 삽입된 곽재용 감독의 코멘터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클래식> 코멘터리에서 내가 거기에 나오는 바람들을 잘 관찰해보라고 얘기했었다. 준하의 영혼이 바로 ‘바람’이다. 다음 작품이 <바람개비>인데, 이 영화의 바람하고 연관이 있다고 말했었다. <클래식>에서는 그 바람에 대해서 몰라도 되지만, 여기서는 드라마에 좀더 붙였다. 이 영화 속에서는 바람이 굉장히 중요하다.” 바람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바람개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제목도 그렇게 붙였었다. 곽재용 감독은 책상 위에 놓인 여러 장의 바람개비 스케치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편의적으로 부르던 이름이 제목이 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 지금의 제목이 나온 것이다.

멜로와 코미디가 주가 될 <여친소>에는 30층 옥상에서의 고공낙하, 러시아 마피아 밀매조직과의 거대 총격전 등의 액션장면도 곳곳에 등장한다. 하지만 어색할 건 없다. 곽재용 감독이 추구하는 ‘복합장르’에서 기점은 관객과의 호흡이다.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관객이 따라올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곽재용 감독은 <클래식>의 ‘감성’과 <엽기적인 그녀>의 ‘성격’이 만나는 지점에 굉장한 반전을 숨겨놓았다고 한다. 궁금해진다. 도대체 뭘까?

- 시놉시스

과잉 열정으로 끓어넘치는 순경 여경진(전지현)은 소매치기를 잡으려던 여고교사 고명우(장혁)를 오히려 범인으로 착각하고 체포한다. 예의를 중시하는 점잖은 선생님 고명우는 미안해하지 않는 경진에게 화가 난다. 얼마 뒤, 유흥가 청소년 단속에 나섰다가 파트너로 다시 마주한 두 사람. 경진의 수갑에 묶인 명우는 그녀가 뛰어다니는 범죄현장에 할 수 없이 끌려다니게 된다. 명우는 점점 경진에게 애정을 느끼고, 과잉 책임감으로 곳곳을 뒤지는 그녀의 안전을 위해 그뒤를 따른다. 천지차이 두 남녀의 애정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불량 경찰? 그래도 우린 정의의 깝스

<마지막 늑대> | 구자홍 감독

- 이 영화를 만들기까지

1996년 그는 3년간 광고회사 다니면서 번 돈을 들고 무작정 파리로 갔다. 세계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도시에서 원없이 영화를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시네마테크를 전전하며 하루 3∼4편의 영화를 보는 생활은 2년 넘게 이어졌다. 책에서 이름만 접했던 숱한 작가들의 영화를 직접 대면하면서 감독이 되겠다는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구자홍(37)씨는 다소 독특한 경로로 “레디, 액션”을 부르는 자리에 오게 됐다. 재수생이었을 때, 서강대 커뮤니케이션센터에 드나들던 그는 서강대 사회학과에 다니면서 꾸준히 흔히 볼 수 없는 영화를 찾아다녔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주변에는 어떻게 하면 감독이 되는지 알려줄 사람은 없었다. 당장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일단 광고회사에 취직한 구자홍씨는 CF도 영화카메라로 찍는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현장은 늘 재미있었고 예상보다 오래 회사를 다녔다. 회사를 그만두고 파리에 머물다 돌아왔지만 감독의 길은 여전히 묘연했다. 당장 할 일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대학로의 한 극단을 찾아가 8개월간 연극 워크숍을 하기도 했다. 감독이 되기 위해 자양분이 될 만한 것은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었던 때였다. 그뒤 일단 시나리오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혼자 틀어박혀 시나리오를 쓰다 답답한 마음에 시나리오작가교육원을 찾았다. 파리에서 본 수백편의 고전과 자신이 쓰는 시나리오 사이의 괴리감이 문제였다. “눈은 높은데 막상 써보니 그렇게 안 되는 걸 깨닫는 과정”이었던 셈. 그는 작가교육원에서 김대우 작가를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말한다. 김대우 작가는 오랜 실전경험에서 우러나는 가르침을 줬고 구자홍씨는 한동안 김대우 작가의 조수로 일을 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쓴 시나리오 <마지막 늑대>가 영화사 제네시스픽쳐스(대표 정태성)에 팔렸고 감독까지 맡아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 이런 영화

구자홍씨는 1999년 3월에 <마지막 늑대> 시나리오를 썼다(곧 개봉할 스웨덴영화 <깝스>가 비슷한 이야기지만 구상을 한 시기는 <마지막 늑대>가 앞선다). 연출의 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IMF 때 일자리, 일, 실업, 구조조정, 퇴출…. 지겹도록 이런 소리를 방송에서 듣고 또 듣다가 이 이야기의 첫 스토리를 썼다. 아무 일도 안 하겠다는 남자의 얘기. 그러나 그 야무진 꿈에 태클이 걸린 얘기. (중략) 뚜렷이 똑 부러지게 말하고 싶은 슬로건이 있었다기보다는 어떤 기분이 있었다. 그때의 먹구름처럼 무거웠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반대급부로 들었던 ‘이것만은 아니잖아’ 는 기분.” <마지막 늑대>는 일이 싫어 시골 파출소로의 전근을 자청한 강력계 형사의 이야기다. 은근히 일하지 않는 것의 즐거움을 선동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감독의 삐딱한 시선이 느껴지는 영화. 그가 이 작품을 쓴 또 다른 계기로는 집에서 노트북컴퓨터를 도난당한 사건이 있다. 파출소에 신고를 했더니 방문조사를 나온 경찰관이 “그런 건 찾을 길이 없으니 포기해라”라는 분위기로 얘기하는데 그 모습에 화가 났다기보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구자홍씨는 <마지막 늑대>를 유머러스한 드라마라고 말한다. 두 경찰관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그리는 코미디이지만 연출자의 입장에서 드라마의 완결성에 비중을 많이 두겠다는 말로 들린다.

- 시놉시스

지난 20년간 단 한건의 사건사고도 일어나지 않은 강원도 산골의 한 파출소. 서울에서 강력계 형사를 하던 최 형사(양동근)가 이곳으로 전근을 온 이유는 일 안 하고 살고 싶어서다. 반면 파출소의 고 순경(황정민)은 최 형사와 달리 서울에서 강력범을 잡는 진짜 경찰이 되고 싶어 안달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사고가 없는 파출소를 정리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서울로 돌아가기 싫은 최 형사는 파출소를 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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