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주택에서 살고 있는 도일(김진근)과 미숙(심혜진) 부부는 아이가 없다는 것말고는 남부러울 데가 없이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아이를 입양하기로 한 두 사람은 보육원에서 여섯살난 진성(문우빈)이란 남자아이를 데려와 양자로 삼는다. 부부는 어두운 성격의 진성을 친자식처럼 사랑하려 노력하지만 둘 사이에 친자식이 생기면서 예전처럼 진성에 대해서만 마음을 쏟을 수 없게 된다. 도일 부부가 자신의 진짜 부모가 될 수 없음을 안 진성은 정원에 있는 큰 아카시아 나무를 엄마라 여기며 대화를 나눈다. 어느 날 진성이 사라진 뒤 앙상한 가지만 있던 아카시아 나무에 꽃이 피면서 가족들에게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 Review아마도 어떤 관객은 2년 전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된 싱가포르영화 <나무와 아이>(데이지 챈 감독)에서 죽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커다란 나무와 특별한 교감을 나눈 아홉살 소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아이처럼, 영화 속에서 아이들은, 특히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끼는 아이들은, 종종 보통 사람들이 소통의 대상이라고 생각지 않는 그런 존재와 대화를 나누곤 한다. <아카시아>의 여섯살난 소년 진성 역시 그런 아이다. 어느 상류층 가정에 입양되었다가 양부모들이 그만 친자를 갖게 된 바람에 새로 얻은 가족으로부터 배제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 아이는 정원에 말없이 서 있는 아카시아 나무가 죽은 ‘진짜 엄마’라고 생각하고 그 나무하고만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비극은 아이와 나무 사이의 그 은밀한 소통이 방해받는 그때부터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박기형 감독의 신작 <아카시아>는 굳이 장르 구분을 하자면 초자연적인 현상을 끌고들어온 호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영화는 진성의 아카시아 나무 주위에서 일어나는 불가해하면서 끔찍한 사건들이 우리의 주의를 모은다. 하지만 <아카시아>는 일반적인 종류의 호러영화, 즉 보는 이로 하여금 즉물적인 공포의 감정을 얻어내려고 기를 쓰는 유의 호러영화는 아니다. 아마도 이 점은 최근에 국내에서도 소개된 일본 호러영화 <주온>과 비교해보면 확실해질 것이다. <주온>이라는 영화의 관심사가 이런저런 영화적 테크닉을 동원해 온통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고 그들에게 순간적인 두려움의 감정을 주입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면 <아카시아>는 그런 식의 화들짝 놀라게 하는 공포를 전달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물론 여기서도 몇몇 짧은 꿈 혹은 환상장면들에서 과장된 사운드 같은 것을 이용해 일종의 충격효과를 노리기도 한다). 그래서 <주온>이 제공했던 것과 같은 유의 공포 효과를 기대하는 관객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카시아>는 어쩌면 영 실망스런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하튼 <아카시아>는 무서운 영화이고 섬뜩한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이건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우리 자신의, 혹은(이 말이 너무 직접적이라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현대인들의 흉하거나 잔인한 초상을 꽤 날카롭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영화는 우리가 속한 가족(과 사회)이란 게 지극히 배타적인 연대감 위에 형성된 것은 아닌가, 하고 묻는다. 가족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가족의 작동원리 아래에서 비틀린 가족적 연대감이 형성되고 자연스레 ‘타인’에 대한 배제가 일어난다. 처음에 이해심 많고 자상한 사람들처럼 보였던 진성 가족은 결국 핏줄이 다른 진성을 집 밖으로 내몬다. 그런 진성의 처지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A.I.>에서 친자식의 귀환과 함께 부모의 사랑을 잃게 되는 로봇 데이빗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가 않다. 그러나 그 둘의 공통된 처지는 집을 나가기 전까지이다. 집을 나선 뒤 모험의 여정을 벌이는 데이빗과 달리 진성은 말 그대로 ‘실종’된다. 그리고 <아카시아>의 카메라는 진성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때 그를 가족으로 맞아들였던 집안에 계속 머무르면서 그 가족이 서서히 파멸에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노인들은 진성과 특별한 교분을 가진 아카시아 나무의 저주 아래 놓이고 예전에 서로 사랑했던 도일과 미숙 부부는 서로 적대적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관계로 돌입한다. 이 파멸의 홈드라마에는 아무래도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느 정도 담겨 있기에 이걸 보는 데에는 공포의 감정이 동반되지 않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 여기에는 박해자 진성의 자취가 남아 있고 묻어 있기에 이 홈드라마는 슬픈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올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아카시아>는 분명 영화팬들의 관심을 끌 만한 자질을 갖춘 영화다. 그건 우선 이 영화가 박기형 감독의 장편데뷔작 <여고괴담>과 마찬가지로 장르의 틀 안에다가 사회적인 발언을 녹여내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 같은 일을 좀더 세련되고 번듯한 스타일과 외양으로 꾸며낼 줄 아는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에서 특히 돋보이는 스타일 가운데 하나는 긴 호흡으로 카메라를 이동해가면서 하나의 테이크를 만드는 방식인데, 이런 방식을 통해 영화는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관계’의 문제를 다루는 것임을 알려주기도 하고 아니면 다른 경우에는 이것이 희생자 혹은 그에 동조하는 자의 시선을 유지하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붉은 실이나 아카시아 나무 등을 이용해 만들어낸 초자연적인 비주얼 역시 매력적이다.
한편으로 <아카시아>는 내러티브상의 무언가 미약함 혹은 미진함이 느껴져 아쉬움을 남기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무리 이것이 비주얼과 분위기를 중시하는 영화라고 해도 분명 이야기를 전달하는 대중영화임을 고려한다면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구축에서의 밀도가 좀더 강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심혜진이 연기한 미숙 캐릭터는 진성에 대한 끌림과 반발을 함께 갖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런 입체적인 면이 잘 살아 있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이건 아마도 스토리가 좀더 꽉 짜일 수 있는 가능성을 약화하는 데 기여한 바가 있을 것이다. 번듯한 비주얼 만들기에 들인 노고를 내러티브 구축에 조금 더 나눠주는 그런 영화를 보기가 참 쉽지 않다.
::가족호러가족이란 유리그릇 같은 것
<장화, 홍련> <아카시아>, 올해 주목받은 이 세편의 공포영화는 공포의 대상을 가족에서 구한 영화다. 가족을 낯설고 두려운 존재로 여기는 이런 영화가 한꺼번에 쏟아진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유교적 전통에 입각한 가족이데올로기가 파괴되는 과정을 암시하는 흥미로운 사례처럼 보인다. 물론 이런 유의 영화가 한국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흔히 ‘가족호러’라 불리는 이 장르는 60년대부터 미국 호러영화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해왔다. 히치콕의 <싸이코>는 초기 가족호러에서 가장 대표적인 영화. 어머니는 아들을 유혹하는 여자들을 참지 못하는 질투의 화신, 금욕의 감시자로 등장한다. 히치콕의 무서운 어머니는 <캐리>나 로 이어진다. 어머니에 이어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른 건 아이들이었다. <엑소시스트>와 <오멘>에서 아이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내뱉거나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한다. 가족 구성원 일부가 아니라 가족 전체가 비정상적 상태로 등장하는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도 70년대 미국 가족호러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도살자 가족은 베트남전의 악몽에 시달리는 미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80년대 가족호러는 <할로윈> <나이트메어> 등 시리즈물로 나온 슬래셔영화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할로윈>의 마이클은 부모를 살해한 아이로 등장하며 <나이트메어>의 프레디는 부모 세대에 대한 복수를 아이들에게 자행했다. 한편 최근 일본의 호러영화들은 미국영화보다 한국의 가족호러에 훨씬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걸로 보인다. 나카다 히데오의 <링> 시리즈와 <검은 물 밑에서>, 미이케 다카시의 <오디션> 등은 현대 도시를 살아가는 핵가족이 처한 위험과 불안을 보여준다. 오늘날 가족의 평화는 유리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것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