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세잎에 하나 더,꿀로 붙여줘,우미노 치카의 <허니와 클로버>
2003-10-16
글 : 이명석 (<여행자의 로망백서> 저자)

<허니와 클로버>라, 듣기만 해도 온몸에 닭살이 돋고 그 소름들 사이사이에 끈적이는 꿀물이 흘러들어와 촉촉하게 적신 뒤에 식물성 기름으로 살짝 튀겨내놓을 것만 같은 제목이다. 그래,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꿀이란 그저 끈적거리며 인간을 유혹하는 악마의 액체일 뿐이다. 많이 먹으면 머리가 아프다. 클로버는 괭이풀과 비슷하게 생긴 식물로 어디서나 잘 크는 잡초일 뿐이다. 행운을 이야기하는 네잎도 사실은 기형의 돌연변이에 열성이다. 그러니까 <허니와 클로버>라는 뻔한 제목을 겉으로 내놓고, 사실은 인생의 폐부를 찌르는 공포 이야기를 그려낼 수도 있다. 제발 그래주면 안 될까? 사실 그쪽이 훨씬 마음 편하다. ‘꿀과 토끼풀’이라니. 솔직히 꿈꾸는 소녀들이 아니고서는 이런 제목의 만화를 내놓고 읽을 수 있겠나?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미노 치카의 <허니와 클로버>(학산문화사 펴냄)는 그 제목의 상식적인 뉘앙스에 너무나 잘 들어맞는 만화다. 그럼에도 나같은 냉혈한도 붙잡아둘 수 있는 다정한 매력의 작품이다.

미술대학교 앞의 자취생 아파트에 몇명의 남학생들이 살고 있다. 듬직한 체구에 충견이라 불릴 정도로 순둥이인 다케모토, 겉으론 냉정해 보이지만 연상의 디자인 회사 사장을 좋아하는 마야마, 재능과는 달리 만년 유급생이고 가끔씩 사라져 큰돈을 벌어오는 모리다라는 세 입주자가 만화의 한쪽 축이다. 그리고 천재 아티스트이지만 요정처럼 작고 어려 보이는 하구미, 시장 주점의 딸로 미끈한 몸매와는 달리 왈패인 야마다라는 두 여자가 반대쪽 축을 이루고 있다. 그 설정은 미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청춘로맨스코미디다. 전형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들 사이의 서로 엇갈린 사랑의 함수가 만화를 엮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자취생 아파트에서 함께 살아가는 남자 주인공들의 모습에는 1980년대 <기린관 그래피티>와 같은 동거드라마의 흔적이 보이고 그 후계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가난에 찌든 학생들의 ‘고기 쟁취 투쟁’ 같은 장면에서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삶의 진솔한 모습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이 만화가 전 시대의 동거코미디와 확실하게 결별하고 있는 것은 그 스타일 감각이다. 예술가 지망생이라는 신분에서 나오는 다양한 액세서리와 장치들은 안노 모요코의 <젤리 인 더 메리 고 라운드>, 야자와 아이의 <나나>와 같은 동시대의 일급 스타일리스트 만화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화려함을 보여준다.

제목에서 풍기는 ‘달콤 풋풋’이라는 뉘앙스의 바깥으로 나가는 법은 없지만 이 만화에 담긴 요소들은 매우 복합적이다. 미스터리 프로페셔널 만화의 냄새를 풍기는 모리다의 신비로운 외도, 여러 인물들이 작심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대소동과 1970년대 공포만화까지 끄집어내는 과감한 패러디, 다케모토와 젊은 새 아버지와의 어색한 만남이 만들어내는 고전적인 드라마 양식….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그 맛을 잘 살리고 있지만, 만화 전체의 흐름에서 지나친 스타일의 기복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단행본 2권에서 너무 개그 일변도로 나가 초반에 형성된 주인공들의 신비로움이 탈색돼버린 점이 불만족스럽다. 특히 하구미의 작은 체형과 수줍은 성격으로 만들어낸 신비로운 요정의 이미지, 삶의 공식 궤도를 떠나 있는 모리다의 자유인으로서의 매력이 왁자지껄한 친근함 속으로 흡수돼버린 점이 아쉽다.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이미지와 주인공들의 특이한 개성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사건 등이 이 만화를 아름답게 구성하고 있지만, 그 뼈대가 되는 것은 역시 애틋하면서도 흥미로운 연애의 구도다. 다케모토는 하구미가 가장 편하게 대하는 사람으로 다가갔지만, 하구미를 인형처럼 가지고 놀면서도 또 다른 애정을 쌓아가는 모리다와는 연적이 되고 만다. 마야마는 야마다의 일방적인 사랑을 거절하지만, 그 역시 디자인 회사의 사장인 리카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을 거두지 못한다. 이 불행한 삼각의 끈은 하구미의 삼촌인 하나모토 교수와 리카, 그리고 그녀의 죽은 남편 하라다의 별난 삼각의 우정에 이어져 있다. 함께 모여 웃고 떠드는 것은 좋다. 꿈 많은 젊은 날, 둘보다는 셋, 셋보다는 넷이 재미있다. 그런데 왜 사랑은 하나와 하나가 해야 하나? 세잎의 클로버는 나머지 한잎을 붙여줄 꿀이 필요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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