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이 드문 네바다의 고속도로 옆에 위치한 어느 모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폭우로 길이 끊기자 쉴 곳을 찾던 열 사람이 이곳에 모여든다. 중년 부부와 아이, 까다로운 성격의 여배우와 그녀의 운전기사, 경찰관과 그가 호송 중인 살인범, 라스베이거스에서 막 결혼한 젊은 남녀, 라스베이거스를 떠나 고향으로 향하던 매춘부 등 10명은 묘한 우연으로 얽힌 사이. 사건은 여배우가 살해당하면서 시작된다. 세탁기에서 그녀의 잘린 머리와 9호실 열쇠가 발견된다. 곧이어 경찰관이 호송 중이던 살인범이 탈출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일행은 겁에 질린다. 하나둘 시체가 늘어가고 8, 7, 6, 5 카운트다운을 하듯 죽은 자들의 품에선 순서대로 방번호가 적힌 열쇠가 나온다.
■ Review<아이덴티티>는 영리한 영화다. <유주얼 서스펙트>나 <메멘토>의 계보를 잇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이야기에 빠져드는 강력한 흡인력이 된다. 만약 당신이 추리소설의 문법에 익숙하다면 <아이덴티티>의 재미는 배가될 것이다. 외딴 모텔에 모인 열명이 하나둘 살해된다는 설정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떠올릴 만큼 추리소설을 많이 봤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누가 살인범이냐는 질문 자체가 이 영화가 파놓은 결정적인 함정이기 때문이다. 범인에 대한 추리가 그럴듯해질수록 <아이덴티티>의 반전은 절묘하게 느껴진다.
이런 유의 영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영화적 속임수다. 관객은 속는 재미에 극장을 찾고 뒤통수를 치는 반전에서 쾌감을 얻는다. <유주얼 서스펙트> <식스 센스> <디 아더스> 등이 화자의 진실성을 뒤엎는 데서, <메멘토>가 시간의 순서를 뒤집는 데서 그 묘미를 안겨줬다면 <아이덴티티>는 두 가지 수법을 다 사용한다. <아이덴티티>의 화자는 객관적인 태도를 가장한다. 각 인물이 어떻게 이 모텔에 도착하게 됐는지를 설명하는 도입부는 <펄프 픽션>이나 <매그놀리아>처럼 카메라의 시선이 일방적으로 등장인물 누군가의 편에 서 있지 않다는 걸 보증한다. <아이덴티티>의 화자는 중반부를 지나서야 정체를 드러낸다. 화자의 뒤늦은 등장은 이야기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시간의 흐름 또한 조작한다. 경찰관이 호송 중인 살인범은 모텔에서 살인사건이 나기 전에 이미 그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처럼 보인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프리 크라임’도 아니고 그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시구, “내가 계단을 올라갔을 때 그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이 지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아이덴티티>는 과거와 현재의 시점을 교묘히 뒤섞어서 논리적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다. 물론, 이것은 영화적으로 조작된 시간 또는 편집이 만들어내는 착각이다.
<아이덴티티>는 액자구조로 이뤄진 영화다. 액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모텔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인 반면 액자 밖은 사형선고를 받은 다중인격 살인자의 이야기다. 액자 안에 있는 모텔 살인사건을 장르적 관습에 충실하게 그린 다음 액자 밖의 이야기에서 출구를 찾는 것이다. 이는 장르적 관습을 비판하겠다는 의도라기보다 장르의 유산을 적극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다. 명백히 <싸이코>의 베이츠 모텔을 연상시키는 무대장치를 보라. 라스베이거스에서 돈을 훔쳐 달아난 여자가 모텔에 도착할 때 영화는 모텔 주인을 범인으로 의심해주길 바란다. 달아난 살인범이 수상한 만큼 살인범을 호송하는 경찰관도 석연치 않다.
그의 무전기는 종일 터지지 않고 양복 안에 입은 티셔츠 뒷면엔 큼직한 구멍이 나 있다. 여배우의 운전기사인 전직 경찰 에드는 가장 신뢰할 만한 침착성을 보여주지만 이런 유의 영화에선 믿음직한 인물일수록 범인일 확률이 높다. 그런가 하면 시종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소년도 의외의 범인이 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영화는 등장인물 각각에 그럴듯한 의혹을 던져주면서 미스터리영화의 긴장감을 만든다. 그런 다음 희생자의 등 뒤에 갑자기 살인범이 등장하는 슬래셔영화의 공포가 첨가된다. 이나 <아쿠리아스>처럼 희생자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반면 등장인물들은 자꾸 흩어져서 살인마의 활동무대를 넓혀준다. “제발, 혼자 다니지 좀 말라”고 소리치고 싶은 욕구가 스크린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아이덴티티>에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존 쿠색이 연기하는 에드다. 어느 날 삶의 목표를 잃고 경찰 일을 그만둔 그는 모텔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계기로 열정과 신념을 회복한다.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차분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에드는 살인자에 맞설 지력과 담력을 보여준다. <아이덴티티>는 부드러운 여피족의 이미지가 강했던 존 쿠색에게서 험프리 보가트 같은 터프한 매력을 발견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캅랜드> <처음 만나는 자유> 등을 연출한 제임스 맨골드는 <스크림>의 프로듀서였던 아내 캐시 콘래드가 영국 작가 마이클 쿠니의 시나리오를 사자마자 감독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그만큼 시나리오의 창의적 면이 두드러진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덴티티>는 반전의 충격이 오래 지속되는 영화는 아니다. <식스 센스> <디 아더스> <메멘토> 등이 결말을 알고나서 처음부터 다시 짜맞추는 재미를 주는 반면 <아이덴티티>는 여러 가지 해석이나 설명이 불필요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이덴티티>는 그런 한계를 미리 알고 적절히 이용한다.논리적 정합성이 필요없는 스릴러, 그것이 <아이덴티티>의 진짜 영리함이다.
이번엔 경찰, 믿으시겠어요? 배우들
<아이덴티티>는 주·조연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 앙상블드라마이다. 존 쿠색이 연기하는 에드가 가장 비중있는 인물로 나오지만 다른 배우의 비중이 존 쿠색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살인범을 호송하는 경찰관 로즈로 나오는 레이 리오타는 <좋은 친구들>의 주인공으로 익숙한 배우. <썸씽 와일드> <무단침입> <터뷸런스> 등 상당히 많은 영화에서 악역을 맡았던 그는 <아이덴티티>에서 관객을 혼란에 빠트리는 인물이다. 레이 리오타의 악역 이미지를 알고 있는 관객에게 그가 맡은 경찰관 로즈는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라스베이거스를 떠나 고향으로 향하던 매춘부 패리스로 나온 배우는 <나인 야드> <체인징 레인스> <하이 크라임> 등에 출연했던 아만다 피트. <아이덴티티>에는 패리스에 관한 재미있는 농담이 하나 나오는데 그녀가 자기의 이름이 패리스(파리)라고 말하자 로즈는 “거긴 가본 적 없는데”라고 답한다. 모텔 주인 래리로 나오는 존 혹스는 <퍼펙트 스톰>에 나왔던 배우로 국내 관객에겐 아직 낯선 인물이다. <요람을 흔드는 손> <분노의 역류> <삼총사> 등으로 낯익은 레베카 드 모네이는 가장 먼저 살해당하는 여배우 캐롤라인으로 등장한다. 캐롤라인은 <아이덴티티>에서 교통사고를 내놓고도 다친 사람을 내버려두고 가자고 주장하는 이기적인 인물로 나와 동정의 여지가 없는 희생자가 된다. 연쇄살인범 말콤 리버스로 나오는 프룻 테일러 빈스는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데뷔작 <헤비>에 나왔던 배우로 <아이덴티티>에서 다중인격자의 표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1995년 <머더 원>이라는 TV시리즈로 에미상을 받은 바 있다. 신혼부부로 나오는 클레어 듀발과 윌리엄 리 스콧은 각각 <처음 만나는 자유>와 <진주만>으로 낯이 익다. 윌리엄 리 스콧은 <덤 앤 더머> 속편에 출연할 예정이기도 하다. 이 밖에 어딘지 모자라 보이는 중년 남자 조지로 나온 존 C. 매킨리는 <더 록> <애니 기븐 선데이> 등에 출연한 배우이고 호송 중인 죄수로 나온 제이크 부시는 <프라이트너>에서도 연쇄살인자로 나왔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