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은 만날 때마다 반가움에 덥석 손을 잡고 싶은 사람이다. 가끔씩 그가 배우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최민식은 상대방의 경계심을 순식간에 허물어버린다. 처음 만났을 때나 여러 번 만났을 때나 그건 변함이 없다. 배우 최민식은 언제나 인간 최민식부터 열어 보인다. 그건 당신에게 숨기는 게 없다는 제스처인 동시에 한발 다가오라는 주문이다. 이상한 것은 이런 순간 그에게 어떤 가식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오래 알던 사이라고, 마음이 통하는 관계라고 느끼고나면 불현듯 이게 최민식의 매력이라는 게 실감난다. 그는 연기에서나 실생활에서나 자신의 모든 것을 진짜라고, 진심이라고 느끼게 만든다.
<올드보이>에서 그가 영문도 모른 채 15년간 갇혀 있던 남자 오대수로 나온다고 했을 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최민식이 주인공을 맡으면서 <올드보이>는 만화적 발상에서 영화적 발상으로 옮겨갔고 오대수의 사연에 궁금증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100% 상상의 산물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최민식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일단 몸무게부터 줄였다. <취화선>을 찍으면서 늘어난 체중을 줄이기 위해 그가 찾은 곳은 김광선체육관. 권투를 하면서 10kg을 떨쳐낸 최민식은 이번 영화에서 상당한 액션장면도 소화했다. 지난 6월 공개한 촬영현장에서 그는 혼자 10명이 넘는 건달과 싸우는 장면을 찍었다. 누군가 “쯔쯧, 배우도 못할 짓이군” 하는 소리를 할 만큼 이날 최민식이 찍은 액션장면은 격렬했고 보는 사람조차 진을 빼는 혹독한 것이었다.
“군무를 보는 듯한 수려한 액션을 해야 하는데 아쉽죠. 하지만 대신에 리얼리티는 살아 있는 것 같아요. 싸우면서 지치고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이니까.” 그는 <넘버3>나 <쉬리> 같은 영화를 찍긴 했지만 <올드보이>처럼 힘든 작업은 처음이었다고 말한다. 체력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찍은 <올드보이>에서 그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타성에 젖고 매너리즘에 빠져요. 그런데 이번 영화는 장면마다 신선하고 자유로워요. 기존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면모죠. 분명 신선한 충격을 줄 거라고 봐요.”
영화의 전모가 공개되지 않은 상황이라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실제 어떤 인물인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로 보면 오대수에겐 <해피엔드>의 서민기, <파이란>의 강재, <취화선>의 장승업이 겹쳐 있는 듯 보인다. 망가지고 좌절하고 억제할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떠는 인물, 최민식의 얼굴에는 15년간 갇힌 적이 있다 해도 그랬음직한 상처와 아픔이 느껴진다. 하지만 세월이 그의 얼굴에 드라마틱한 사연을 새겨놓았어도 눈빛은 변함없다. 어린아이처럼 선해 보이는 두눈은 깊게 팬 주름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부조화의 조화가 최민식이 갖는 또 다른 장점일 것이다. 다른 배우라면 조바심을 내겠지만 최민식은 나이가 드는 것을 반가워한다.
“세월이, 시간이 연기를 위한 좋은 재료이고 자양분인 건 분명해요. 10년 뒤면 세상을 더 넓게,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젊은 시절엔 무대에 오르는 일이 그저 재미있고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지금은 연기가 인간적 깨달음을 얻고 세상을 더 느낄 수 있는 계기라고 말하면서 최민식은 세월이 가르쳐준 감수성이 어떤 것인지 예를 든다. “지난주 일요일에 녹음실을 가는 길이었어요. 단풍과 낙엽이 한창인 길인데 할아버지 두분이 팔짱을 끼고 걸어가요.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지 파안대소하면서, 칠순이 다 된 노인들이, 그것도 할아버지 두분이, 너무 천진스럽게 웃는데, 가을이 확 느껴지더라구요. 젊었을 때는 그런 풍경을 봐도 스쳐지나거나 아무 느낌이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풍경이 눈에 확 들어오고 나도 모르게 서글퍼져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하구요.” <병원24시> 같은 TV다큐에서 사람의 감정을 배운다는 그는 이처럼 예민한 시선으로 삶을 포착하고 표현한다. 최민식의 두눈이 깊고 맑아 보이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