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태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 ‘유지태의 실체와 허상’, ‘과대평가된 배우, 유지태’…. 유지태는 툭하면 오해되거나 분석되어야 할 존재, 혹은 원치 않은 과대평가로 인해 비판받는 존재였다. 스물여덟이 된 올해, 세편의 영화가 차례로 스크린에 올랐고, 그는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물질적인 몸의 무게를, 물리적인 나이의 무게를 훨씬 뛰어넘는 이름 석자의 무게는 그를 짓누르는 듯이 보였다. 그는 괴로워 보였으며, 설핏 방어적으로 기자를 대하는 듯도 보였다. 하지만 그는 괴롭지도 또한 방어할 것도 없다고 대답했다. “전 이제 스물여덟이에요. 실수할 수도 있고, 장르 선택에 실패할 수도 있죠. 그게 더 자연스러운 나이 아닌가요? 방어할 만한 게 뭐 있나요.” 그러나 <내츄럴시티>와 <거울 속으로>의 개봉 후유증이 <올드보이>에의 몰입을 방해할 정도였단다.
솔직히 부대꼈단다. 들리는 말들로 인해 극에 완벽히 몰입할 수 없었고,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마다 부대꼈다고. 아마 힘들고 미안했다는 말이리라. 그럼에도 <올드보이>의 추억은 말할 수 없이 달콤했다. 박찬욱 감독의 꼼꼼한 연출력과 최민식의 든든한 앙상블은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연기 환경이었다. “다시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정말 행복했어요. 그냥 보기만 해도 뿌듯하더라고요.”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최고의 감독과 선배 배우에 둘러싸여 스스로도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채근하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자신에게 짜증이 일기도 했다.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할까라는 소릴 몇번이나 했어요. 한번에 내지르지 못하고, 한 호흡을 남겨 속으로 갈무리하는 습관도 벗어버리고 싶었어요.” 연기에 대한 혹은 연출에 대한 그의 완벽성은 예민한 그의 속살에 무수한 상처를 남겼다. 바깥에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의 단단한 벽이 이참에 아주 깨어지기를 은근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극에서 극으로. 완벽한 자기 파괴를 위해 그는 철저히 날것이 되어야 했다. 그는 그 방법을 직감적으로나마 알았던 것일까. 차기작으로 선택한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그의 ‘날것 되기’ 노력에 참으로 적합한 오브제였다. 이제 무언가 시작되었고, 그것은 점차 가속을 내기 시작했다. 날것이 되려는 첫 번째 노력이란,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머리 속을 비운다는 거 남들이 하는 소리는 들었지만, 직접 해보긴 처음이에요. 뭐든 유지태스럽던 생각이나 행동을 하나둘 버려나갔죠.” 그것은 지금까지 착실히 쌓아온 이미지를 버리겠다는 얌전한 말로는 부족한 것이다. 뭔가가 깨져나갈 땐, 고상이나 우아 따윈 없는 것이다. 순서나 질서 따위도 물론. 저 점잖은 얼굴 아래에서 좌충우돌 생각의 덩어리들이 엉키고 충돌하고, 결국 텅 비어가는 강렬한 전쟁이 벌어지는 중이란다. 최민식에게 깍듯이 대하고, 웃을 땐 눈꼬리가 먼저 내려가고, 그 다음엔 “음홧홧” 시원한 웃음소리를 안기는 유지태의 모습은 오늘도 여전했지만, 그 안에서 슬금슬금 비어져 나오는 야생성은 그가 원하는 날것의 형태를 짐작게 했다. 과묵한 조심성과 영민한 눈초리, 수식없는 직관. 이제 유지태는 날것이 되었다.
“무서울 때가 언젠지 아세요? 연기를 할 때예요. 늘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죠.” 배우란 감독의 페르소나, 즉 가면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결국 감독이 하는 말을 대신하는 앵무새일 뿐이라고 생각할 즈음, 박 감독이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지태야, 내가 머리 속으로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해도 배우가 그걸 어떻게 표현해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그 말이 왜 그리 가슴에 남던지. 요즘 그는 시나리오 한편을 쓰고 있다. 내년 봄쯤엔 직접 연출한 영화 한편으로 관객과 마주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