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올드보이>의 최민식, “죽어 마땅한 인간이 있을까”
2003-11-14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올드 보이’ 열연 최민식

〈올드 보이〉의 극중 초반 오대수가 술 취해 파출소에서 ‘깽판’을 치는 장면에서 그는 “오늘만 대충 수습하면서 살자고 내 이름이 오대수인데 수습이 안 된다”고 자조 어린 농담을 한다. 술 좋아하고 떠들기 좋아하던 평범한 샐러리맨 오대수는 오늘 하루가 아니라 15년을 수습하지 못하는 극단의 상황에서 복수심에 불타는 ‘괴물’로 변해간다. 배우 최민식(41)은 ‘소시민’과 ‘괴물’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두 시간 동안 유유히 헤엄쳐 나간다. 거기에는 대책 없고 주책없는 ‘이강재’(파이란)와 광기 번득이는 ‘장승업’(취화선), 쭈뼛거리고 흔들리는 ‘서민기’(해피엔드)와 싸늘하고 가차없는 ‘박무영’(쉬리)이 함께 숨쉰다. 이처럼 〈올드 보이〉에서 최민식은 자신의 보여온 연기의 지류들을 하나의 정점으로 끌어모았다.

그의 연기를 묘사하는 데 ‘신기’라는 표현조차 진부해져 버리는 최씨에게 뭐가 도전일까 싶지만 최씨는 오대수가 “새로운 연기 스타일의 도전”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동안 했던 역들은 어딘가는 존재할 법한 현실의 인물들이었지만 오대수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인물이다. ‘했다, 한다’로 끝나는 문어체적인 대사들도 관성적인 리얼리즘 연기로는 소화할 수 없는 것이었고.” 〈파이란〉을 찍기 전, 어느날부터 머리를 안 감고 부스스해지면서 늘어진 운동복 바람으로 건들거리며 다니더니 ‘강재’가 되어 촬영 현장에 나타나더라는 식의 준비가 애초에 불가능했던 오대수 역에 최씨는 이전과 다른 방식, ‘몰입’이 아닌 ‘거리 두기’라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전까지 배역에 다가가는 과정이 나 자신을 들볶고 괴롭히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관찰하면서 정리해나가고 몰입하기보다는 객관화시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질척거리고 무대책이 대책이었던 인간 오대수는 이런 과정을 통해 “통나무처럼 건조하고 툭 치면 껍데기가 뚝뚝 떨어져나갈 것 같은 인물”로 서서히 변신해나갔다.

영화를 찍기 전 박찬욱 감독은 최씨에게 오대수를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찰스 브론슨 같은 “고전적인 영웅의 모습으로 그리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복수를 꿈꾼다는 면에서 오대수는 분명 영웅적인 어떤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씨가 만들어낸 오대수는 ‘나약한 영웅’이다. 망치를 들고 일당백으로 싸우기도 하지만 정작 싸워야 할 적과는 상관없는 ‘헛발질’에 불과하고, 단호한 걸음으로 이우진의 펜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엘리베이터의 비밀번호를 몰라서 헤매다가 ‘뻘쭘’해진다. “나에게 비춰진 오대수는 영웅다운 면모는 찾아볼 수 없는 불쌍한 한 인간일 뿐이다. 그가 괴물로 변해가는 것조차 극단적인 궁지에 몰렸을 때 평범한 사람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느껴졌다. 사실 우진 등 다른 등장인물도 나에게는 불쌍하고 측은한 사람들로 보인다. 세상에 죽어 마땅한 인간, 정말 나쁜 놈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나.”

이처럼 ‘연민’은 최씨가 극중 배역을 만날 때 갖게 되는 가장 큰 감정이다. 서로 다른 인물임에도 오대수나 서민기나 이강재에게서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 흘러나오는 건 ‘출구 없는 삶들’에 대한 최씨의 연민이 이들에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배우라면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연기한 배역들에서 최민식의 인상과 최민식의 인성이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 사람에 대한 연민이 내가 세상을 보는 필터이고 또 내 연기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피해갈 수 없는 것 같다.”

최씨는 배우가 아닌 인간 최민식을 이야기하면서 ‘하자투성이’, ‘애프터서비스가 필요한 인간’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단순한 겸양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 말이 세상에 대해 그가 느끼는 측은함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모두의 찬탄과 상찬 한가운데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내가 보잘것없는 놈 같다”는 느낌은 그래서 최민식 개인에게는 행복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간단치 않은 배우 최민식을 만나는 관객에게는 축복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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