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축제, <허공에의 질주>
2003-11-20
글 : 정여울 (문학평론가)

단 한번의 ‘사인’도 보낸 기억이 없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도 나도 서로가 알고 있음을 알았다. 스무살의 첫사랑, 그는 살뜰한 배필과의 결혼과 번듯한 직장으로의 첫 출근을 앞두고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술을 먹는 둥 마는 둥, 그는 불쑥 영화를 보자고 했다.

영화 <허공에의 질주>의 대니 가족에게는 삶 자체가 여행이다. 반전운동 전력으로 여전히 FBI 감시의 표적인 엄마 아빠 덕에, 대니(리버 피닉스)와 동생 해리 모두 매번 이름을 바꾸며 위험할 때마다 머물렀던 곳을 떠난다.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것조차 한참 뒤 ‘암호’로 들어야 하는 대니의 아버지. 잠행과 추적으로 얼룩진 삶, 그러나 그들의 일상은 불안과 우울보다는 유머와 열정으로 가득하다. 조개껍질 목걸이를 생일선물로 받아도 눈물을 글썽이며 행복해하는 대니의 어머니. 스치는 일터마다 노조와 세미나를 만드는 엄마 아빠에게 어릴 적부터 유쾌한 혁명교육(?)을 받는 아이들. 분명 그와의 마지막 만남을 예상한 ‘스무살의 진혼곡’ 같은 술자리였지만, 리버 피닉스의 서늘한 눈빛을 따라가던 나는 어느새 옆에 앉은 첫사랑 따윈 잊은 채 ‘여행, 혹은 유쾌한 잠행’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미래를 향한 공포가 일상을 위협할 때마다, 소중한 이에게 간도 쓸개도 덥석 내주고 싶을 때마다, 이 영화와 함께 해왔다. 처음 본 순간 보통 인연이 아니리라 짐작했던 후배가 덜컥 유학을 떠난다 선언했을 때, 그의 조급함이 안쓰러웠다. ‘새내기의 광란=스무살의 특권(?)’도 경험하지 못한 채, 1학년 1학기에 미국 유학을 떠나 스물일곱살에 박사가 되어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이 영화를 선물이자 매파로 삼아, 말하고 싶었다. 우린 지금도 충분히 바쁜 삶을 꾸려나간다고. 떠나는 그의 손에 ‘어설픈 운동권’스런 책 몇권을 떠넘기며, 그가 세상이 훈육하는 속도와 중력을 거슬러, 자신만의 리듬을, 자신만의 파고(波高)를 간직하길 빌었다.

이 영화를 함께 본 친구들의 머릿수만 합쳐도 마을버스 한대 정도는 너끈히 채울 터. 얼추 열두번은 본 것 같은데, 반은 혼자 마음껏 콧물을 훔치며 보았고, 반은 친구들과 포복절도하며 ‘야부리’ 반, ‘쏘주’ 반을 섞어 영화를 함께 들이켰다. 한동안은 ‘도망자’인 대니의 어머니가 12년 만에 부친을 만나 대니를 맡아달라며, 작은아들이 다 자라면 자수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매번 ‘미리 준비한’ 휴지가 콧물 뒤범벅이 되곤 했다. 대니를 보내면 “FBI에 쫓기며 공항에서 몇분씩”밖에 만날 수 없음을 알지만, 어머니에겐 아들의 예술적 재능이 잠행으로 인해 숨쉴 수 없는 고통이 더 크다. “우린 조직이야. 조직은 깨지면 안 돼”라고 절규하며 대니의 독립을 온몸으로 거부하던 아버지가 “자전거 내려. 넌 여기 남는다”고 데면데면하게 뇌까릴 때. 가장 사랑하는 것과 의연히 이별할 수 있는 용기. “가족? 보는 사람만 없다면 버리고 싶다”는 일본 영화감독의 고백에 은밀히 공감했던 내게, 그들은 가족 사이에도 동지적 우정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가족이 나의 욕망을 억압한 것이 아니라 내게 가족을 친구로 만드는 용기가 없었을 뿐.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허공에의 질주>는 이 고통스러운 질문에 짐짓 유머로 화답하는, 나직한 추임새다. 영화를 보고 또 볼수록, 길 잃은 아이처럼 울기보다는 점점 더 주책없이, 더 많은 장면에서 키득키득 웃어대는 나. 대사를 거의 암기하다시피 하지만, 이 영화는 매번 다른 장면에서, 매번 낯선 울림으로 말을 걸어온다. 이제 굳이 일상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마다 비디오방을 찾을 필요가 없다. 기억의 채널 어느 한구석에서 원하는 장면을 언제든 복원해낼 수 있으니. 두려움을 잊은 자에게 어둠은 친구이며, 고통을 웃는 이에게 잠행은 축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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