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재투성이 속에서 태어났는걸. 착하고 예쁜 은실이를 괴롭히던 표독한 영채도, 음습한 지하터널에서 랜턴을 켜들고 안나를 인도하던 <나비>의 유키도, 낡고 초라한 서민아파트에서 외롭게 살아가던 <올드보이>의 미도도, 분홍색 드레스로 치장한 공주는 아니었다. 실로 <올드보이>의 최민식이나 박찬욱과 함께 있는 강혜정은 ‘촬영장의 꽃’이라기보다는 ‘박찬욱사단’의 ‘일병 1호봉’에 가깝다. “…니다”로 마무리짓는 깍듯한 말투며, 허리가 휘어질 듯한 90도 인사. 모든 공을 선배와 감독에게 돌리는 겸손함까지. 최민식은 강혜정을 “지금껏 함께 연기한 여배우 중에 최고”라며 흡족해한다. 그러나 그런 그가 흡족한 것은 최민식만이 아니다.
<올드보이>의 미도는 생경한 매력의 캐릭터다. 소녀인 듯, 소년 같고, 아이인 듯 여인 같은. 성별도, 연령도 상관없이 그저 사랑하고, 사랑받는 ‘인간’ 같다. “미도는 외로운 아이잖아요. 힘들게 자랐으니 어린 나이에도 많은 욕망을 누를 수밖에 없었을 거고. 그러다보니까 또래들보다 조숙했을 테고. 나는 다른 종족이다, 그렇게 생각했을 테고. 물론 세상 남자들이 다 시시해 보였겠죠. 그러다가 오대수를 본 거죠. 예사롭지 않았을 것 같아요. 같은 종족을 본 것 같은 느낌, 서로를 알아보는 거죠. 사랑에 빠지는 거…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쓰러진 대수를 처음 집으로 데리고 온 미도가 밤새 그가 쓴 ‘악행의 자서전’을 읽고 난 아침. 강혜정은 이 신을 “가장 힘들었던 촬영”으로 기억한다. “선배님, 왜 이렇게 안 되죠?” 답답한 나머지 최민식에게 물었다. “잘하고 싶어서… 너무 잘하고 싶어서 힘들었나봐요.” 그때 최민식은 “넌 이미 미도에게 많이 ‘밀착’되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처럼 해”라고 어깨를 다독였고, 박찬욱 감독은 “공간을 느껴보라”고 했다. “‘이게 내가 발라놓은 벽지, 내가 보는 TV, 내가 쓰는 컴퓨터구나, 나는 여기서 먹고 자고 생활하고 있어’라고 생각하니 점점 미도가 어떤 아이인지 느껴지더라구요.” 또한 영화의 사건이 어떤 식으로 풀려가든지 간에, 모든 것을 상황에서만 반응해야 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나는 끝까지 아무것도 몰라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야 했다. 그렇게 <올드보이>는 “가슴을 비우는 것”이, “아무 생각 안 하고 연기하는 것”이 제일 고되게 다가왔던 영화였다.
박찬욱 감독은 오디션장에 들어선 강혜정이 “우울해 보였다”고 기억한다. “<나비> 끝내고 <올드보이> 들어가기 까지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연기하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거든요. 일은 하고 싶은데 할 일은 없고…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다가 막상 연기했는데 바보같이 하면 어떡하나, 조바심도 계속 나고, 스스로 무능력해지는 기분도 들었구요.” 그렇게 <올드보이>는 강혜정에게 뭐니뭐니해도 “정신건강상 아주 좋은 치료제”였다. “원래 나란 아이, 고집도 세고, 마음대로였거든요.” 자신 안의 모든 것이 어질러져 있다고 느껴진 순간, 이 모든 것을 정리하려면 다 내버리고 다시 채워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뀌어야 한다!”고 몇번이고 되뇌었다.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행동이 있어도 서른번을 걸르고 걸렀다. 더이상 남지 않으면 가만히 있고, 조금 남았으면 그때서야 말하고 행동했다. “고집도, 카리스마도 다 없어졌다니까요. 헤헤.” 오죽하면 <올드보이> 분장팀장이 “아니! 강혜정의 그 멋진 카리스마 다 어디 갔냐?”며 놀리기까지 했을까.
5남매 중 4째로 자라나면서 “머리 짧게 자르고, 체육복만 입고, 오히려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사내아이 같은 학창 시절을 지내온 탓인지 강혜정의 걸음걸이며, 웃음 속엔 여전히 사내아이 같은 느낌이 묻어난다. 하지만 그 호탕한 웃음 속엔 얼핏얼핏 독한 요부의 기운도 숨어 있다. “아이 같은 느낌, 소녀 같은 느낌, 여자 같은 느낌, 그런 게 동시에 찾아올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저마다 때가 있는 거겠죠.” 스스로를 “거칠고, 본능적”이라고 말하는 강혜정. 그러나 재투성이 소녀가 쓰윽하고 얼굴을 닦아내리자, 거기엔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로 사랑하는 남자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한 말간 여인의 얼굴이 드러나고 있었다.